박준규씨 사퇴/민자의 새 고민 대구동을 보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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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개혁 가장 큰 피해자” 지역정서 암초/“여 애먹이려 물러났다” 관측도 나와
박준규 전 국회의장이 30일 미국에서 「국회의원직 사퇴의 변」이란 한장의 메모를 팩시밀리로 전송함으로써 30년 정치생활을 마감했다.
박 전 의장이 메모에서 밝힌 사퇴이유는 『오랜 정치풍상끝에 얻은 만성피로증과 신경성 고혈압』에 따른 병가. 이와함께 『자신의 뜻과 능력밖에 있음을 통감하는 작금의 국내정치 상황』을 배경으로 덧붙이고 있다.
국내에 있는 그의 측근들은 한결같이 병을 강조한다. 박 전 의장은 처음 가벼운 두드러기증상이 있어 검사를 받아본 결과 「만성피로증후군」이라는 병에 걸려있음을 알게됐다. 그래서 현재 머물고 있는 미국 플로리다 딸의 집에서 통원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측근들이 전하는 정계은퇴의 더 큰 이유는 박 전 의장 본인보다 부인 조동원씨(65)의 중병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같은 이유만으로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는 듯하다. 박 전 의장은 지난 4월 의장공관을 떠나 외유에 오를 때까지만 해도 『의원직 사퇴는 생각해본 일 없다』는 의원직 고수의 입장을 분명히 했었기 때문이다.
그의 사퇴변에서 주목되는 대목은 「작금의 국내상황」이라는 표현이다. 박 전 의장이 「뜻과 능력밖에 있는 작금의 정치상황」이라고 한 것은 여러가지로 추측할 수 있다.
우선 코앞에 닥친 재산재공개의 문제가 있다. 지난번 재산공개가 대부분 실제보다 저평가된 점이 많기에 박 전 의장 역시 재공개할 경우 재산이 늘어남으로써 또 다시 여론의 질타를 받을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 이를 고려해 미리 의원직을 사퇴했을 것이란 추론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 역시 미흡한 구석이 많다. 측근들이 『이미 들춰질 것은 다 들춰졌고,받을 비난은 다 받았기에 더 이상 피해를 볼 것도 없다』고 주장하듯 당시 그의 재산상황은 거의 다 알려진 셈이다. 박 전 의장 역시 『윤리특위의 활동에 적극 협조하겠다』며 재공개과정을 통해 오히려 명예를 회복할 수 있으리라 호언하기도 했다.
박 전 의장은 정계은퇴와 관련된 또 다른 정치상황으로 빠뜨릴 수 없는 것은 당초 정계은퇴를 요구한 여권 핵심부의 의지다. 재산공개는 개혁과 사정의 첫 출발로 시작됐던 일이며,그 결과는 정치권의 물갈이였다. 박 전 의장은 60년 5대 국회때부터 정치권에 몸담아온 구 정치인이다.
어쨌든 남은 문제는 TK의 본거지인 대구에서의 보궐선거다. 민자당은 최근 김종한 대구시 사무처장을 대구동을 지구당 조직책으로 내정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처지다. 새 정부의 개혁에 가장 비판적인 지역여론 때문이다.
지난 5월15일 경북고 등 학교 개교기념일,모교에 모인 동창생들은 임기가 끝난 동창회장인 박 전 의장을 새 회장으로 재추대했다. 뿐만 아니라 41회 졸업생들은 수감된 동기생 박철언의원을 위한 성금을 거두자는 얘기도 했다고 한다.
한 참석자는 이날 모임의 분위기를 『새정부에 의해 피해를 본 동창 정치인에 대한 단순한 동정이나 동문애가 아니라 새 정부의 개혁에 대한 반감의 표현』이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TK핵심은 「고통을 전담하고 있다」는 정서를 갖고있다.
김 사무처장은 「피해자 TK=민정계」라는 지역정서에서 볼때 상대적으로 불리한 민주계 출신이며,한번도 선거를 치러보지 않아 득표력도 알 수 없다.
반면 지난 총선의 경우 박 전 의장과 5천표차로 2등을 했던 서훈당시 국민당후보(2만9천7백표 득표)는 탄탄한 지역기반에 이미 지난 4월 박 전 의장이 재산공개 문제로 물의를 일으킬 때부터 다시 뛰기 시작해 만만찮은 상대다. 서씨도 원래는 통일민주당 출신으로 3당 합당후 공천을 받지못해 국민당으로 출마했었다. 민주당의 경우 지난 총선에서 도영화씨가 출마했으나 5천여표를 얻는 부진한 성적을 거뒀기에 다른 사람을 공천할 가능성이 높다.
민주당은 지난 6월 경북 예천 보선에서 개혁비판적인 지역여론을 피부로 느꼈기에 비판분위기가 더 강한 대구도심에서 치러지는 이번 보선에 적잖은 기대를 걸고 총력전을 펼칠 것으로 예상된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박 전 의장이 민자당의 이같은 곤란한 상황을 예상하고 보선을 치르게 하기위해 의원직을 사퇴한 것이 아니냐는 추론까지 나올 정도다.<오병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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