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꿈 부풀어 두려움 없었죠"-6·25 때 평양 입성 선무방송 인천 금숙희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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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금숙희씨(64·인천시 산곡2동)는 한국 전쟁 중 최초로 평양에 입성한 노 여성용사다. 그는 50년10월19일 보병 1사단 12연대 정훈과 대북 방송 요원으로 평양 땅을 밟았다.
「북진통일」의 꿈에 부풀어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 금씨가 첫 선무 방송을 시작한 것은 이날 낮 12시45분. 그는 『친애하는 인민군 오빠여러분』을 거듭 외치며 평양시내에 숨어있던 패잔병들에게 『어서 빨리 자유의 품에 안기라』고 귀순을 재촉했다.
『포성·총성이 채 가시지 않은 때였지요. 위험을 무릅쓰고 평양시내 구석구석을 누비며 설득방송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두려운 마음은 없었어요. 이 한몸 희생돼 나라가 통일된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있겠느냐는 생각뿐이었지요』
금씨가 대북 방송요원으로 군에 발을 디딘 것은 남북이 38선을 두고 대치 중이던 48년. 그는 당시 인천에서 대한 청년당 요원으로 반공 활동을 벌이던 중 국군의 지원요청을 받고 흔쾌히 군복을 입었다.
6·25 발발 전 개성일대 등 서부전선을 무대로 대북 방송을 펼쳤던 그는 전쟁시작과 함께 전선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대로 따라 움직이며 선무 활동을 벌였다. 피아가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낙동강·다부동 전투에선 교전 중간 중간 적의 코앞까지 진출, 심리전을 펼쳤다. 당시 20대 초반 금씨의「미주」에 녹아 팔공산 전선에서는 인민군 소좌가 44명의 부대원을 이끌고 투항해 오기도 했다. 『전선에서 선무 방송은 대단한 위력을 발휘합니다. 속이 빤히 들 여다 보이는 얘기라도 심신이 지쳐있는 병사들은 이를 달콤한 설득으로 받아들이지요』
금씨는 한때 국군을 따라 평북 운산까지 북상했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해야 했던 일이 가슴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고. 그는 52년12월 국군의 후퇴 중 휴가를 얻어 귀향했으나 이후 전선이 교착되는 바람에 그대로 고향 인천에 눌러 앉았다.
그는 일상으로 돌아온 뒤에도 한국전쟁 부녀회 경기도 회장을 맡는 등 군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보여왔다. 금씨는 53년 중매 결혼한 남편과 1남1녀를 두고 있다. <김창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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