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개혁,열린 정치(유승삼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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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김영삼정부는 오는 4일로 출범 꼭 1백일을 맞는다. 미국 정치에선 이 기간을 흔히 허니문이라고 부른다. 개인의 신혼초처럼 대통령과 국민·의회·언론이 달콤한 밀월을 즐기는 것을 일컫는다. 실제로 이 기간에는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가 높고 의회나 언론도 가혹한 비판은 삼가는게 미국정치의 오랜 관행이다.
어느때 누가 대통령이 되건 일정한 준비기간은 필요한 법이라는 너그러운 이해와 새 대통령에 대한 기대 및 격려가 어우러져 만들어진 정치적 관행이다.
○정신없이 보낸 1백일
그런 관행이 우리에게도 필요한지 아닌지 생각해보기 이전에 우리들은 이제까지 한번도 그럴 수 있는 기회조차 가져보지 못했다. 그 동안의 정치사는 권위주의적 통치로 일관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1백일 가까운 지난 나날은 우리도 모처럼 미국인들처럼 대통령과의 밀월을 즐길 수 있었던 기간이었으나 행인지 불행인지 이번에도 미국인들이 누리는 느긋한 즐거움을 맛볼 수 없었다. 한마디로 정신없이 보낸 1백일이었다. 김영삼대통령의 사정휘몰이는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어서 그저 당하거나 박수치거나 둘중 하나일 뿐 봐주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황망중에도 다행스러웠던 것은 그 예측못했던 휘몰이가 일단은 대다수 국민의 박수를 받을만한 내용이었다는 점이다. 가장 최근의 여론조사에서도 김영삼대통령은 여전히 86.5%라는 놀랄만한 지지도를 유지하고 있다. 참으로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대단한 인기다. 여론조사가 실시된 이래 역대 어느 미국대통령도,허니문기간에도 70%를 넘는 지지는 얻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김영삼대통령도,국민도 다 함께 냉철해져야 할 시간이다. 꼭 미국의 관행을 빌려 1백일이 지났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다. 대통령 혼자 밀어붙이고 국민은 그저 구경꾼으로 박수나 치고 있었던 상황은 이제까지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정작업이 더 이상 필요없다는 말은 아니다. 사정을 더욱 밀도있게,더 조직적으로,더욱 균형있고 항구적으로 추진해 나가기 위해서라도 지나온 길을 돌아볼 줄 아는 냉정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김영삼대통령의 사정이 단숨에 대세를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그것이 필요했던 것,국민이 마음속으로 바라던 것이었다는데 있다. 그러나 그 범위와 강도가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는데도 그 한가지 원인이 있다.
결과적으로는 그 예상 밖의 사정범위와 강도가 국민의 지지를 더 높일 수 있었지만 냉정히 생각해보면 바로 그 「예상밖」에 불안과 위험요소가 깃들여있다. 누구도 혼자서 옳은 선택만을 하리란 보장은 없다.
○지지만큼 불안 깃들여
만약 앞으로 「이번에도 이것은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다」는 확신아래 아무도 예측못한 그 어떤 것을 내놓았는데 그것이 다수의 반대에 부닥친다면 어쩔 것인가.
독주는 언제나 위험하다. 민주정치가 공개정치,예측가능한 정치를 지향하고 있음은 무엇보다 그런 위험성을 경계해서다. 그런데 현재의 주변 분위기에는 그런 독주의 위험성을 스스로 경계하기는 커녕 공개정치의 요구,예측가능한 정치의 요구를 기득권층과 우회적 반발로 여기는 경향마저 있다. 지난 시대의 먼지와 오물이 잔뜩 묻어있어 언제 어떻게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하는 요구와 엄정하고 합리적인 개혁을 바라는데서 하는 요구를 분별할줄 아는 지적 안목 없이는 박수치는 구경꾼은 많아도 고락을 함께 할 동반자는 많을 수 없을 것이다.
예측 가능한 정치를 위해 김 대통령은 우선 장기적 전망을 제시해야 한다. 정직한 정부는 민주정부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될 수는 없다. 김 대통령이 그리는 한국사회는 과연 어떠한 사회인가.
우리 사회가 안고있는 문제점은 부정·부패 이외에 또 무엇이라고 보는가. 그를 이룩하고 해결하기 위해 언제,무엇을,어떻게 할 작정인가.
많은 국민들이 김 대통령의 사정작업 자체에 대해서는 속 후련히 여기면서도 기득권층과는 또 다른 의미의 불안감을 갖고 있는 것도 그에 대한 대답을 얻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는 출국을 하는데 누구는 출국을 안하다가 구속이 되고,철저히 파헤치는가 싶더니 서둘러 덮어버리기도 하는 등 박수 속에서도 고개가 갸우뚱거려지는 것도 그동안의 사정이 치밀한 장기계획의 한 단계라기보다 파헤치고 보자는 식의 즉흥적이었던데 원인이 있을 것이다.
『모든 잘못된 것은 파괴해야한다. 그러나 건물을 파괴할 때 그 건물의 각 부분이 어떻게 결합되었는가를 알아 위태롭게 주저앉지 않게 철거하는 건축가의 조심스러움을 배워야 한다』고 사학자 콩도르세는 말한바 있다. 이는 사정도 분야마다 방법이 다르고 계획이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과 통한다.
○장기 매스터플랜 필요
김영삼대통령의 개혁은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다음 대통령까지도 또 다시 이런 작업을 되풀이해야 한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지겨운 일이다. 이번으로 개혁을 완성하려면 반드시 국민의 동참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의식개혁운동과 같은 캠페인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국민 각자에게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장기 전망을 심어주면서 그 실현방법과 수단에 대해서는 비판과 질책을 오히려 유도하는 그런 열린 개혁,열린 정치라야 국민의 적극적 참여가 가능할 것이다. 앞으로의 1백일은 그런 날들이 돼야한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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