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원시적 사고’에 속수무책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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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 01면

정전사고 8시간50분 만에 서둘러 복구한 삼성전자 기흥 공장 6, 7라인 현관 앞에서 서너 명의 직원들이 모여 담소하고 있다. 삼성전자 측은 4일 현재까지 정확한 정전 사고의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다고 밝혔다. [신인섭 기자]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정전으로 3일 오후 반도체 생산라인 6개가 한꺼번에 중단됐던 삼성전자 기흥 공장이 사고 발생 하루 만인 4일 정오부터 정상 가동에 들어갔다. 이번 사고 라인은 휴대전화 등에 쓰이는 낸드플래시 메모리를 주로 생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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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관계자는 “사고 뒤 긴급 공사를 해 3일 자정쯤 모든 라인에 전원이 다시 공급됐고 4일 정오부터는 정상 가동을 했다”며 “예상보다 빠른 복구로 피해액도 당초 예상(500억원)보다 적은 400억원에 그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번 사고는 아직 원인을 밝혀내지 못해 궁금증을 자아낸다. 삼성전자 측은 “원인을 파악하는 데 시간이 꽤 걸릴 것”이라고만 해명하고 있다.

우선 한국전력 측은 공장 내 변전소로 들어가는 전선까지는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삼성 측도 이를 인정한다. 공장 내 변전소는 삼성이 자체적으로 건설해 운영하고 있다. 사고 직후 한전 측은 삼성 측에 연락했지만 “변전시설에 문제가 생겼다. ‘순간 전압강하’ 현상 같은데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으니 기술진 파견 등은 필요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삼성의 이런 반응은 지난달 12일 15초간의 순간 전압강하 때와 달랐다. 삼성은 당시 “우리 잘못은 없다”며 한전 측의 실수였을 가능성을 언급했었다.

이 대목에서 순간 전압강하란 뭘까. 한양대 오재응(기계공학부) 교수는 “기계에 전기 과부하가 일어난 뒤 전압이 일시에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며 “이번 반도체 공장 사고도 전기누전보다는 이 같은 과부하 때문에 생겼을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그런데 반도체 공장에는 무정전전원장치(UPS) 등 각종 안전장치가 있는데도 왜 대규모 정전사태로 확산됐을까.

반도체 공장이 정전으로 한두 개 라인에 차질을 빚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라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하지만 이번처럼 여러 라인이 동시에 정전돼 생산 중단에 이른 사태는 한 차례도 없었다고 한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우리도 1년에 한두 번씩 정전되는 일은 있지만 2중, 3중의 백업시스템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공장 이 올스톱되지는 않는다”고 의아해 했다. 한편 UPS는 원래 용량에 한계가 있다고 한다. 반도체 공장은 전력 사용량이 많기 때문에 사고가 나 이 시스템이 작동한다 해도 1시간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 그래서 철저히 백업시스템을 갖춘다. 하지만 이번 사고는 이런 백업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숭실대 김재철(전기공학과) 교수도 “보통 배전반을 이중화하는 안전장치를 설치하는데 이번 사고에서는 이런 장치까지 마비된 것 같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전기적 이상이 있을 때 차단기가 작동해야 되는데 이것도 완전히 멈췄던 것 같다”며 “공장을 지을 때 이 같은 대비를 충분히 하지 않은 것 같다”고 덧붙였다.

삼성전자는 “각 라인에 설치된 전기설비가 아니라 공장 전체 라인에 공급하는 변전소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기흥공장 관계자도 “새가 날아들거나 관리자의 실수 등 단순한 이유가 아니어서 원인 규명에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고 당시 현장에 출동했던 용인소방서 관계자는 “이날 사고 때 난 연기는 정전 직후 비상발전기를 돌리는 연료로 사용된 등유에서 발생했다”며 “비상발전기는 오염물질 정화시설을 하지 않아도 돼 가동과 함께 검은 연기가 피어 오르는 것”이라고 했다.

일반 발전소에선 대기정화장치를 이용해 오염물질을 걸러내고 수증기만 내보내기 때문에 하얀 연기가 피어 오른다.

◇자체 발전량은 왜 충분하지 않았나=이번 정전 직후 비상발전시설을 가동했지만 공장을 풀가동할 만큼 전력을 생산하지는 못했다. 삼성전자의 자체 발전시설 용량은 평상시 필요전력의 20% 가량인 8만㎾/h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계 최고라는 삼성전자가 전기가 끊겼다고 가동이 중단되는 걸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 나오는 이유다.

하지만 재계 관계자들은 ‘비용과 효율을 따져야 하는 기업의 입장에선 당연한 선택’이라고 입을 모은다. 10년에 한 번 사용할까 말까 한 비상발전시설 용량을 필요전력의 100%로 갖추는 것은 낭비일 뿐이라는 것이다.

◇반도체 생산에 왜 전기가 중요할까=장인순 원자력연구원 고문은 “80년대 말까지만 해도 한국의 전기 질은 뛰어나지 못했다”며 “30분의 1초만 정전돼도 정밀 기계는 오작동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원자력이 전체 전력 생산량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면서 주파수(60사이클)와 전압(220볼트)이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는 고급 전기가 생산됐다는 것이다. 장 고문은 “가전제품만 해도 주파수와 전압이 일정하지 못하면 오래 사용할 수 없다”며 “반도체와 같은 초정밀 제품은 고급 전기가 공급되지 않는 나라에서는 만들 수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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