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 눈치보기 바쁜 검찰/슬롯머신·동화은 수사과정서 위상 흔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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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정씨 내부비호세력 터지며 “사면초가”/수사에 혼선… 청와대 사정의지 못미쳐
검찰이 흔들리고 있다. 위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문민시대 출범과 더불어 감사원과 함께 사정의 쌍두마차로 큰칼을 휘둘러대던 검찰이 시간이 지날수록 원숙한 검찰력을 행사하기는 커녕 뭔가 일이 안되는 쪽으로만 달음질쳐가고 있는 것이다.
급기야 대통령이 21,22일 잇따라 『검찰내의 슬롯머신 비리 비호세력으로 거명되는 인사들에 대해 철저히 수사해 구속하라』는 이례적 지시를 내리고 검찰의 사정 의지 미흡을 질책하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태까지 빚어져 검찰의 체면은 구겨질대로 구겨져버렸다.
요즘의 검찰권 행사과정은 뭔가 질서가 없고 팔·다리가 따로따로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준다는게 법조 관계자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검찰은 검사 개개인이 수사주체고 공권력의 집행자임이 분명하지만 지금까지 총장을 정점으로 철저한 상명하복 체제를 유지해왔다.
이같은 상명하복제도는 수뇌부가 정치적 외압에 흔들릴 경우 검찰 전체가 권력의 시녀로 전락할 위험성이 있고 실제로 5,6공하에서 국민들은 그같은 경우를 많이 목격하기도 했지만 적어도 검찰권 행사에 있어 최소한의 질서는 있었다.
그러나 최근 대검·서울지검에서 국민들의 관심과 기대속에 진행된 동화은행 비자금사건·슬롯머신업계 비리사건은 정치권의 눈치는 눈치대로 보면서 질서는 절서대로 없는 꼴이 돼가고 있다는 지적이다.
검찰은 문민정부 출범직후인 3월부터 감사원·청와대가 앞장서 사정을 선도하며 달려가자 내심 부담을 느껴왔다.
그러나 재산공개과정에서 비리가 드러난 민자당 김문기의원의 대검 중수부 구속을 시발로 전국 각 지검에서 비리 관련자들이 무더기로 구속되면서 검찰 사정은 본궤도에 돌입하기 시작했다.
안영모동화은행장·김종호 전해군참모총장·정용후 전공군참모총장 등을 구속하고 슬롯머신업계 대부 정덕진씨에 대한 수사가 시작되면서 검찰은 『지금이야말로 문민시대의 검찰상을 정립할 호기』라며 기염을 토했었다. 감사원이 청와대까지 감사하겠다고 나서는 마당이고 보면 검찰도 이 기회에 외압이나 성역이 없는 수사를 펴 국민의 검찰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 검찰 관계자들의 한결같은 바람이었다. 기세등등하던 검찰 수사에 뭔가 이상기류가 감지되기 시작한 것은 6공 실세로 불리던 정치인들이 동화은행에서 뇌물을 받은 사실이 밝혀지면서부터다.
이때부터 검찰 수뇌부는 『거명된 인사중 누구까지를 수사해야 하느냐』를 놓고 고민하는 모습이었고 이원조의원이 검찰의 물증확보 시기와 때맞춰 돌연 출국해버리자 검찰 수사는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임시국회가 끝나는대로 관련자들의 사법처리를 장담하던 검찰은 이 의원 출국이후 김종인의원에 대해서도 슬그머니 수사 연기 방침을 밝혔고 『검찰이 수사성공보다 정치적 계산을 앞세우고 있다』는 비난이 일었다.
검찰을 더욱 난처하게 만들고 늪으로 몰고들어간 것은 서울지검의 슬롯머신 수사다.
검찰은 당초 정씨를 5,6공에서 권력의 비호를 받으며 살아남은 「한국판 마피아두목」으로까지 규정하며 정씨에 대한 수사가 검찰사에 길이 남을 것임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검찰에 구속된 정씨가 함구로 일관하고 배후세력을 엮어넣을 별다른 증거조차 확보되지 않자 검찰은 초조해 하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언론에서 검찰 내부의 비호세력에 대한 보도가 잇따라 터져나오고 급기야 청와대 파견근무를 했던 신길용경정이 정씨가 『L·S·J고검장이 나를 봐주고 있다』고 말한 사실을 폭로하면서 검찰은 사면초가에 몰리게 됐다.
검찰총장이 정씨의 동생 덕일씨가 출두한 사실조차 다음날 아침까지 제대로 보고받지 못하는 촌극이 빚어진 것도 이 즈음이었다.
검찰은 정씨와의 협상을 통해 정씨로부터 돈을 받은 박철언의원을 구속하는 선에서 수사를 마무리지으려는 인상이었지만 여론의 거센 비난과 청와대측의 요구에 밀려 결국 관련고검장들에 대해 수사키로 해 읍참마속을 기대하던 국민들은 물론 통치권에까지도 실망시킨 셈이 됐다. 검찰이 내부 비호세력 수사에 착수하자마자 이건개 대전고검장의 수뢰혐의가 드러난 것은 검찰이 그동안 「눈가리고 아옹」하려 했다는 사실을 반증할 뿐이다.
검찰권이 통치권에 역행하는 방향으로 행사될 수는 없겠지만 정부 스스로 성역을 철폐하겠다고 나선 이상 검찰은 보다 당당하고 솔직한 사정을 해야 하는게 마땅하다는 지적이다.
슬롯머신 수사과정에서 검찰수사가 질서없이 좌충우돌하고 뭔가 조율과 정리가 안되는 모습을 보인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서울지검이 수사과정에서 언론과 계속 마찰을 빚고 검사들이 과도하게 흥분된 모습을 보인 것은 날카롭고 차가운 수사를 통해 많은 결실을 기대해던 국민들을 실망시키는 것이었다.
검찰은 지금 기로에 서있다. 새 정부가 출범하고 사회 전체가 중심을 못잡고 뒤숭숭한 가운데 검찰마저 흔들려버린다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올지도 모른다는 우려까지 낳고 있다.
검찰이 스스로의 중심을 똑바로 잡고 문민시대의 검찰,국민의 검찰로 거듭나기 위해선 자기 환부를 자기가 도려내는 아픔과 고통도 참아내야 한다는 것이 모두의 지적이다.<김종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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