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허구들』|시-공의 개념 벗어나「순수사상」세계 추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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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소설에 대한 장황한 설명 내지는 이론은 제쳐두고, 우리는 소설을 쉬운 소설과 어려운 소설, 재미있는 소설과 골치 아픈 소설로 나눌 수 있다. 이렇게 나누고 보면 각각의 반대되는 것들은 다른쪽의 그것들과 짝을 이루게 된다. 즉『쉬운 소설은 재미가 있고 어려운 소설은 골치가 아프다』로 요약될 수 있겠다. 이것은 너무나 상식적이고도 당연한 얘기다. 그러나 이 너무나 상식적이고 당연한 얘기를 뒤집어엎는 소설이 있다. 바로 보르헤스의 소설이 그렇다.
보르헤스는 소설이란『마땅히 읽기에 쉽고, 또 재미도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작 그의 소설을 읽어보면 그가 주장한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켜주는 작품은 거의 없다. 아니, 한편도 없다고도 할 수 있다.
보르헤스의 소설은 재미는 있지만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보르헤스의 소설은 매우 짧다. 그런데다 문체는 아주 평이하다.
물론 그의「짧은 글」들을 소설의 범주에 자리 메김 하는데 주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미학에 따라 소설이「개연성이 있는 상상의 세계」를 그려내는 것이라고 정의되는 것이라면, 보르헤스의 소설은「개연성은 없으나 가능한 것」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르헤스는 문학의 조건을「비현실성」에서 구한다. 그래서「상상 가능한 관념적-진짜 말 그대로의 허구적[대상」만을 문학의 기반으로 간주한다. 이 관념적 대상이라는 것이 바로 보르헤스 글의 주제다. 보르헤스의 글에 빈번히 나오는 주제는「시간」과「공간」의 개념에 관한 것과 기존의 문학·철학·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다. 그래서 우리가 보르헤스의 글을 읽을 때 느끼는 곤혹스러움은 그의 글 자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가 다루고 있는 주제에 대한 우리의 무식함에서 오는 것이다.
보르헤스의 문학을 한마디로「형이상학적 환상문학」이라고 하는데, 그의 수많은 글-시·수필·짧은 소설-중에서 그의 글쓰기 특징을 가장 여실히 드러내는 작품집으로『허구들』을 들 수 있다.『허구들』은 1944년 그 이전에 발표했던『두 갈래 오솔길이 있는 정원』을『기교들』과 한데 묶어 발표한 작품집이다. 작품집의 제목이 나타내주는 것처럼 이 작품집에 실린 16편의 글들은 여태까지 소설에서 얘기하던「허구」라는 개념을 완전히 거부하고 있다.
여태까지 소설에서 얘기하던「허구」를「현실적인 것」에서 풀려 나온 상상의 타래였다고 한다면, 보르헤스의「허구」는「현실적인 것」의 기반이 없는 순수 상상인 것이다.
『두 갈래 오솔길이 있는 정원』에는 일곱편의 글이 실려있다. 이중 제일 유명한「틀뢴, 우크바르, 오비우스 테르티우스」는 주인공(나)이 해적판 브리태니카 사전에서 우크바르라는 가상의 지명을 발견하면서 시작된다.
나는 우크바르의 서지학적 근거를 추적하다가 이번에는 틀뢴이라는 신비스런 행성에 대해 알게된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한 전재의 주도아래 결성된 비밀운동단체가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이 행성 틀뢴은 특이한 관념론에 의해 지배된다. 이를테면 틀뢴의 언어에는 명사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의 언어는 무인칭 동사만으로도 모든 의사소통이 가능하다.「세기초 런던에서 시작된 이 비밀운동은 2, 3세대로 이어지면서 지상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이에 따라 사람들의 세계인식도 바뀌게 된다. 나는 이들의 줄기찬 노력으로 종국에는 이 세계 자체가 틀뢴으로 바뀌리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 작품은 현실이 텍스트(허구)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텍스트가 현실을 지배한다는 보르헤스의 문학관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두 갈래 오솔길이 있는 정원』은 보르헤스가 대중성을 의식하고 쓴 탐정소설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전통적인 탐정소설과는 다르다. 대개 탐정소설이 사건을 먼저 적시하고 그 사건을 추적하는 이야기를 시차적으로 기술하는데 반해 보르헤스는 두 가지 이야기를 동시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탐정 소설적 기법은 보르헤스의 모든 작품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 독자는 살인의 전과정을 지켜보게 되지만 살인의 목적은 마지막 단락에 가서야 겨우 알 수 있게 된다. 이 작품은 역사적 사실을 기초로 쓰여진 보르헤스의 작품 중 보기 드문 사실주의적 작품이다.
나머지 소설들은 환상적인 것들이다.「키호테의 저자, 피에르 메나르」는 20세기초 피에르 메나르라는 비현실적인 운명의 한 인물이 그 유명한『돈 키호테』와 똑같은 글을 쓰고자하는 열망과 그 과정, 그리고 참담한 패배를 그리고 있다.「바벨의 도서관」은 움베르토 에코의『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수도원 도서관의 원형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보르헤스의 환상은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보르헤스는 시간에 대한 기존의 개념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그의 상상의 세계를 열어가고 있다.
보르헤스에 의하면 시간은 절대적인 것도 아니고, 우리 인식의「선험적 형식」도 아니다. 시간은 그 문자판이 보여주는 것처럼 무한히 반복되는 원이다.「지금, 여기」에는「모든 때, 모든 곳」이 포함돼 있다. 이러한 시간 속에서 각자(주체)는 여기에 있으면서 저기에 있고, 현재에 있으면서도 과거·미래에 있을 수 있다. 낱낱의 개인은 존재하지만 주체는 어디에도, 어느 시간에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없다고도 할 수 있다. 개인의 경험은 각각의 몫을 주장할 수 있는 고유의 것이 아니라, 하나의 원형의 무한이 반복되는 변형일 뿐이다. 그래서 글쓰기라는 것도 한 인간의 한 경험의 표현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하나인「신성한 책(텍스트)」에 대한 하나의 주석을 덧붙이는 것일 뿐이다.「독창적인 글」이란 전통적인 문학관은 그에게는 불필요한, 아니 불가능한 작업이 된다.
이러한 보르헤스의 문학이 요즈음의「텍스트」자체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보면 실로 매력적이 아닐 수 없다. 뒤늦게 60년대에 와서야 서구에서 주목받기는 했지만 서구의 문학은「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 자체에서부터 보르헤스에, 크게는 중남미 문학에 상당한 빚을 지고 있다. 물론 보르헤스 자신이 서구의 문예사조가 범람하던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 또 아르헨티나 작가이기보다는 코스모폴리턴이 되고자했던 경력과 그 문학 세계가 그를 중남미보다는 서구에서 더 인기있고 문제성 있는 작가로 받아들여지게 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논의되는 상호 텍스트성·패러디·놀이로서의 글쓰기·메타 픽션·탈장르 등의 용어는 이미 보르헤스에서 그 단초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으로 분류되는 작품이 상당수 출판되고 있다. 이런 현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느냐,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느냐 하는 문제는 일단 보류한다고 해도 그러한 작업이 심오한 철학적 성찰을 거친 것이냐, 아니냐 하는 점은 꼭 되집고 가야 할 것이다. 보르헤스를 다시 읽어야할 당위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김현철(외국어대 강사·스페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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