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걸음질 인상준 비리수사(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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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최근 검찰의 비리수사가 전반적으로 뒷걸음질치고 있다는 인상이다. 이원조의원의 출국이 「방조」가 아니냐는 의혹과 함께 수사의 형평성문제가 제기되자 국회가 폐회되자마자 이루어질 기세이던 김종인의원에 대한 소환을 연기해버렸는가 하면 슬롯머신 사건도 박철언의원과 엄삼탁 전 병무청장에 대한 수사로 마무리지으려는 기미가 농후하다.
슬롯머신 사건의 경우 검찰은 「정덕진씨의 구속은 출발점이 될 것이며 수사의 궁극적인 목표는 비호세력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호언했었다. 그러나 검찰이 이제까지 밝혀낸 것은 박 의원과 엄 전 병무청장 단 두사람 뿐이다.
슬롯머신업계의 비호세력이나 관련자는 정계·검찰·경찰·안기부 등 광범위한 부문에 걸쳐 있는 것으로 전해져 왔으며 이는 신길룡경정이 언론에 구체적으로 밝힌 바도 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검찰은 그런 내용에 대한 사실확인에는 소극적인 인상을 주었다. 「소문만 갖고 수사할 수 없는게 아니냐」는 것이 검찰의 해명이나 형사입건은 증거나 뚜렷한 혐의가 있어야 하겠지만 내사만은 소문이나 주장을 근거로 얼마든지 해오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검찰은 마치 관련자를 박·엄씨 두사람 뿐으로 단정이라도 한듯 수사의 테두리를 한정하고 있는 느낌을 주고 있다. 특히 검찰의 수사는 박 의원의 비리를 입증하는데 치중하는 듯한 인상이었다. 오래전부터 관련설이 나돌았고 비호세력에 관한 자신의 정보를 공개까지 한 신 경정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수사를 하지 않았고 수배자였던 정덕일씨와 「협상」까지 벌인듯한 인상을 준 것도 수사를 현단계에서 서둘러 마무리지으려는 것이 아니냐 하는 의혹을 낳게 하는 사례들이다.
항간에는 검찰의 이런 자세가 슬롯머신 업계와 검찰의 전·현직 고위직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혹도 일고 있다. 물론 검찰로서도 인간적으로는 곤혹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미 언론에 이름의 이니셜까지 보도된 마당이라면 오히려 철저한 수사로 흑백을 가려주는 것이 검찰 전체를 위해서도,소문의 당사자들을 위해서도 떳떳한 일이 아닐까.
또 검찰의 수사가 축소기색을 보이는 것은 슬롯머신 자금이 정치자금으로 유입된 때문이다,수사를 확대하면 각계에 걸쳐 파문이 너무커서 뒷감당을 하기 어렵게 된다는 등의 추측도 끈질기게 나돌고 있다. 현재까지는 어디까지나 소문의 단계이지만 만약 검찰이 이에 아랑곳없이 수사를 마무리지어 버린다면 소문이 더욱 확대 재생산돼 그 부담이 정부 전체로 확대될 것이다.
이런 점들을 감안한다면 검찰의 수사는 더욱 철저하고 엄정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 대통령도 「성역없는 수사」를 지시한 만큼 검찰이 머뭇거려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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