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세지는 '미국 역할론' … 한·미 미묘한 해법 차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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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들이 1일 아프가니스탄 동부 쿠나르주 산악지대를 정찰하고 있다. 아프간에는 나토군을 주축으로 5만 명 이상의 다국적군이 주둔하고 있다. [쿠나르 AFP=연합뉴스]

아프가니스탄의 한국인 피랍 사태에 대해 한.미 간 미묘한 해법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한.미 양국은 불협화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지난해 말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합의와 미국의 대북정책 변화를 계기로 반전이 시작했다. 올 5월 체결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과거의 동맹 관계를 업그레이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인 피랍 사태는 한.미 관계에 새로운 변수로 등장하고 있다. 국내에선 이번 사태 해결에 '미국의 역할'을 기대하는 분위기다.

피랍자 가족과 정치권.시민단체 등은 "인질 석방의 키를 쥐고 있는 미국이 적극적으로 도와 달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정부는 곤혹스러운 입장이다. 탈레반의 핵심 요구 사안인 탈레반 수감자-한국인 인질의 '맞교환'을 성사시키려면 아프간 정부를 움직여야 한다. 미국의 '오케이(OK) 사인' 없이 어려운 일이다. 그런 가운데 정부는 '미국 역할론'이 부각되는 걸 우려하고 있다. 자칫 17대 대선을 4개월여 남긴 상황에서 반미 감정을 자극하고 한.미 동맹의 균열을 초래할 화두이기 때문이다.

정치권은 이날 한목소리로 미국 역할론을 제기했다.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은 1일 "미국은 동맹국으로서 최선을 다해 달라"며 "테러 세력과 협상하지 않는다는 국제사회의 '보이는 원칙'을 존중하지만 이제는 '보이지 않는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지난해 1월 미국 여성 언론인과 수용소에 억류 중이던 이라크 여성 5명을 맞교환한 사례를 거론했다. 열린우리당 정세균 의장도 "선량한 민간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성의를 보여야 한다"고 요청했다. 한나라당.열린우리당 등 5당 원내대표는 이날 공동성명서를 채택했다. 이들은 성명에서 "미국 정부와 유엔의 적극적이고도 전향적인 자세와 역할을 정중히 요청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2~6일 미국을 함께 방문해 미측의 협조를 호소할 계획이다.

상황이 긴박해지자 대미 외교 라인이 총가동되고 있다. 미국의 입장 변화가 없을 경우 반미 감정이란 돌발 변수가 떠올라 한.미 동맹의 균열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송민순 외교통상부 장관은 2일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참석차 필리핀 마닐라를 방문한다. 이번 피랍 사태 때문에 참석 여부를 한참 고민한 것으로 전해진다. 송 장관은 하루 동안의 짧은 회의 일정을 쪼개 존 네그로폰테 미국 국무부 부장관을 만난다. '테러 단체와 협상하지 않는다'는 미 정부의 원칙과 인질 석방이 절박한 우리 정부의 절충점을 모색하기 위해서다.

이와 함께 미 정부.의회를 설득하기 위해 한국이 '테러와의 전쟁'에 적극 참여해 왔다는 사실을 부각할 계획이다.

그러나 미 정부의 입장은 아직 단호하다. 톰 케이시 국무부 부대변인은 지난달 31일 "한국 정부의 노력을 지원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테러리스트들에게 양보하지 않는다는 미국의 정책에는 변함이 없다"고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이철희.정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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