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배명복시시각각

한여름 밤의 악몽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머리는 냉정하라고 말한다. 이럴수록 침착하고 차분해야 한다고 이성과 합리는 말을 하지만 가슴이 말을 듣지 않는다. 분노가 쌓이면 원한이 된다. 원한 앞에서 이성은 눈이 멀고, 눈먼 이성은 복수를 낳는다. 인류가 되풀이해온 두려운 광기(狂氣)의 역사다. 멀쩡한 우리 국민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이 부조리한 현실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 앞에서 나는 전율한다. 이것은 악몽이다. 한여름 밤의 긴 악몽이다.

 탈레반 무장세력에 인질로 잡힌 23명의 한국인 중 두 명이 벌써 희생됐다. 당장 오늘 아침눈을 뜨면 그 숫자가 셋 또는, 넷이 되어 있을수도 있는 절박한 상황이다. 바람 앞의 등불이 된 남은 21명은 순간순간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로 심장이 타 들어 가고 있을 것이다. 이슬람권 여성들이 착용하는 히잡을 뒤집어쓴 여성 인질들의 넋 나간 표정을 클로즈업해 보여준 납치범들의 소행은 잔인함의 극치다. 다음은 내 아들, 내 형제의 차례일지 모른다는 극도의 불안감에 휩싸여 있을 남자 인질 5명의 가족을 생각하면 잠이 안 온다.

 이런 상황에서 원칙이란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테러리스트와 협상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 미국과 아프간 정부가 지켜온 원칙이라고? 탈레반이 요구하는 수감자와 인질의 맞교환은 ‘테러와의 전쟁’ 원칙에 위배된다고? 장래의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서는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고? 당장 무고한 인명이 속절없이 죽어 나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면서도 어찌 그런 모진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원칙이란 게 왜 있는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인간의 고귀한 생명을 지키자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불특정한 미래의 잠재적 위험을 내세워 극악무도한 테러범들 손에 죄 없는 사람들이 희생되고 있는 눈앞의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것인가. 위험에 처한 사람은 어떻게든 살려 놓고 보는 것이 인간의 도리 아닌가. 올 초 인질로 잡힌 이탈리아 기자 한 명을 구하기 위해 아프간 정부가 5명의 탈레반 수감자를 풀어준 것도 원칙을 떠나 인간적 도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때는 되고, 왜 지금은 안 된단 말인가. 더구나 지금은 여성을 포함해 훨씬 많은 인질의 목숨이 걸려 있다. 현실을 무시한 원칙은 도그마일 뿐이다.

 두 번째 희생자가 발생한 걸 보고도 미국과 아프간 정부는 요지부동이다. 아프간 대통령궁 대변인은 “탈레반과는 절대 거래하지 않는다”고 못 박았다. 톰 케이시 미 국무부 부대변인도 “테러리스트에게 양보하지 않는다는 것은 미국이 지난 20여 년간 지켜온 정책”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동안 테러로 숨진 두 나라의 수많은 희생자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약과란 얘긴가.

 아프간 정부가 마음먹기에 따라 명분은 살리면서도 사태를 수습할 수 있는 유연한 해법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탈레반이 석방을 요구하는 수감자를 은밀히 풀어주면서 이번 사태와 관련한 보복 공격은 없다고 아프간 정부가 약속하는 것이다. 단 수감자 석방에 관한 비밀이 공개되면 보복 공격이 불가피하다는 전제를 다는 것이다. 아프간 정부는 명분을, 탈레반은 실리를 챙기는 선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아니면 비전투원으로 분류된 탈레반 여성 수감자와 인질을 교환하는 방법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의 영향력 하에 놓여 있는 아프간 정부는 이런 해법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시도는, 고려시대 내침해온 거란과 담판을 해 철수를 이끌어낸 서희 같은 노련한 협상가를 내세워 탈레반과 직접 담판하는 것이다. 수감자 석방에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우리의 처지를 정확하게 설명하고, 한 가닥 남아 있을지 모를 탈레반의 양심에 마지막으로 호소하는 것이다. 이마저 실패로 끝난다면 그때는 우리도 어쩔 수 없다. 불행한 일이지만 가슴의 목소리를 따를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이것이 이 지독한 악몽의 결말일지 모른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