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두우시시각각

조순형·박상천, 그리고 김근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8면

 세상사를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다면 판단에 그리 많은 시간을 뺏기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어디 그렇게 단순할 리 있는가. 선의와 선의가 맞부딪치거나, 하나의 사안에 선과 악이 혼재돼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거기서 우리의 고민이 시작된다. 더구나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나와 같은 주장을 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나와 반대되는 주장을 한다면? 꽤 괜찮은 평가를 받는 정치인이 상반되는 주장을 내세운다면? 판단과 선택이 헷갈리지 않을 수 없다.

 범여권의 통합 문제를 둘러싼 논쟁도 그래서 판단이 쉽지 않다. 물론 집권당으로서 누릴 것은 다 누려놓고 막상 선거에 임박해서는 당을 해산해 새로운 당으로 헤쳐 모여 하는 것은 결코 정당하지 않다. 이러면 국민은 정당의 잘잘못을 표로 심판할 방법이 없다. 책임을 물을 곳도 없게 된다. 그러나 큰 명분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냥 있다가는 고사할 게 뻔한 정당에 “꼼짝 말고 국민의 칼을 받아라”고 요구하는 것도 무리다. 그들이 살 길을 모색하는 와중에 벌어지고 있는 것이 바로 통합논쟁이다. “한나라당의 집권만은 막아야 한다”며 반(反)한나라당 세력을 몽땅 끌어 모으겠다는 것이 ‘대통합’이다. “특정 정당의 집권을 막기 위해 이질적 세력을 마구잡이로 묶는 것은 한국정치를 10년은 후퇴시키는 일”이라고 대통합파를 공격하면서 노선과 원칙에 따라 통합하겠다는 것이 민주당이다.

 묘한 것은 양측 핵심인사들의 면면이 정치권에서는 드물게 보는 썩 괜찮은 정치인이란 점이다. 대통합파의 연결고리는 김근태 의원이다. 민주당식 통합의 중심에는 박상천 대표와 조순형 의원이 있다. 이들은 남다른 성실성과 합리성·진지함을 가지고 있는 정치인들이다.

 지난 5월 5·18 민주화운동 27주년을 맞아 범여권 대선주자들이 대거 광주에 모였을 때의 일이다. 시민단체 인사들이 한명숙 전 총리에게 “5월의 누이가 돼 달라”고 요구했다. 민주세력 단일화에 밑거름 역할을 하라는 주문이었다. 김근태 의원의 발언 차례가 왔을 때 그는 “5월의 동생이 되겠다”고 했다. 그는 얼마 후 대선 출마 포기 선언을 하고 대통합의 촉매 역을 자임했다. 쉽지 않아 보였던 범여권의 통합이 속도를 내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그는 골프를 치지 않으며 비싼 식사도 하지 않는다.

 조순형 의원은 성실 그 자체다. 국회 출석률 100%, 국회도서관 최다 이용 의원이다. 물론 술도 골프도 하지 않는다. 당 대표 시절에도 저녁 약속을 거의 하지 않았으며, 오후 7시면 귀가했다. 모범생도 이런 모범생이 없다. DJ나 노무현 대통령도 그의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상대가 누구든 잘못이 있다면 조 의원은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는다. 노무현 후보 선대위원장이었던 그는 노 대통령 취임 직전 “노 정권의 최대 걸림돌은 당선자 본인”이라며 ‘자기 통제’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율사(律士) 출신이 아니면서도 ‘전효숙 헌재 재판장’ 지명의 위헌성을 가장 먼저 지적한 정치인이 그였다.

 박상천 대표는 논리에 철저한 사람이다. 법무부 장관 시절 YS의 차남 김현철씨 사면 문제가 제기되자 원칙을 내세워 반대해 관철시켰다. 야당 대변인 시절 역대 최고의 명대변인으로 꼽히는 박희태 의원과 맞상대하면서 열성 하나로 살아남은 이가 박 대표다.

 성실하고 매사에 진지해 때로는 “답답할 정도로 융통성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 이들이다. 불신 받는 정치권에서 거의 ‘천연기념물’적인 존재들이다. 그렇기에 이들의 말에는 신뢰성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지금 대통합과 민주당 중심의 통합으로 나누어졌다.

똑같이 성실하지만 김 의원은 이념에, 박 대표는 논리에, 조 의원은 합리성에 무게가 실려있기 때문인 듯하다. 대통합을 주장하는 김 의원은 정치현실과 정서적 측면에서 앞서 있다. 민주당 중심의 통합을 외치는 조 의원과 박 대표는 명분과 논리에서 우위에 있다. 당장은 대선과 내년 총선을 앞두고 있으니 김 의원 측 주장이 먹히겠지만, 정치 발전의 측면에서는 조 의원과 박 대표의 주장이 훨씬 설득력 있다.

김두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