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레반과 협상, 알카에다와 달라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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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국 외교 사상 이렇게 난감한 딜레마가 있었을까. 아프가니스탄 한국인 인질 사태는 최악의 요소들로 뭉쳐진 단단한 바윗돌 같다. 이 바윗돌을 깨고 22명의 인질을 사지(死地)에서 구해 내는 것은 정부뿐 아니라 한국인 모두에게 주어진 난해한 도전이다. 비스마르크라면, 키신저라면 이 달레마를 어떻게 벗어날까 묻고 싶은 심정이다.

탈레반 무장세력이 한국인 인질 석방의 대가로 요구하는 것은 돈 아니면 포로로 잡힌 탈레반 전사(戰士)들의 석방, 또는 그 둘 모두다.

그런데 우리 수중에는 돈은 있어도 탈레반 포로는 없다. 탈레반 포로를 석방하는 것은 공식적으로는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권한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미국의 묵인이 있어야 한다. 카불 정부의 생명줄을 미국이 쥐고 있기 때문이다. 하미드 카르자이 대통령이 '카불 시장'으로 불릴 만큼 중앙정부의 통치는 수도권에 한정되었다. 미국과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관계는 부처님과 손오공의 관계다. 미국이 납치범들과의 직접협상 자체를 반대한다는 원칙을 고수하는 한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한국인 인질과 탈레반 포로를 맞바꾸자는 한국의 요청을 들어 주고 싶어도 그럴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인질 석방의 큰 열쇠는 미국이 쥐고 있고, 따라서 인질 석방을 위한 '작업'의 일차적인 대상은 미국이다. 미국도 심각한 딜레마에 빠졌다. 납치범들과는 협상하지 않는다는 원칙에만 매달렸다간 인질들이 희생되는 최악의 경우 그 책임을 뒤집어 쓸 수 있다.

거래를 통한 석방을 묵인하면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이나 이라크의 알카에다에 의한 민간인 납치 사건이 급증하는 사태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부처님 손안의 손오공이라고 해도 하미드 카르자이 대통령의 체면을 고려해 그에게도 작은 열쇠(결정권) 하나쯤은 인정해 줘야 한다.

탈레반 무장세력이 일사불란한 지휘체계 아래 움직이고 있지 않은 것도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다. 인질 석방의 대가로 온건파는 돈이면 된다고 하고, 강경파는 동료 전사들의 석방을 고집한다. 그래서 탈레반의 요구조건이 중구난방으로 나오고 8명의 인질을 석방할 듯하다가 마음을 바꾸었으며, 배형규 목사 살해라는 극단적인 행위로 치달았다. 탈레반 무장세력과의 협상은 알카에다와의 협상과는 차원이 다르다.

우리 인질들이 납치된 아프가니스탄 남부 일대는 토호(지역 원로) 세력과, 중앙정부의 컨트롤을 벗어난 부패한 경찰과, 탈레반과, 마피아가 복잡하게 얽혀 권력의 공백을 틈타 저마다의 잇속을 챙기는 무법천지다. 이슬람권 전문가인 아시아문화개발협력기구(IACD)의 최한우 사무총장은 문제의 납치범들은 탈레반이 아니라 지역 마피아라고 주장한다.

황량하고 척박한 산악지대에서 허기에 지치고 병마에 시달리는 한국의 젊은이들이 살려 달라고 절규하고 있다. 한계상황이다. 시간이 많지 않다. 우리가 세울 원칙은 하나다. 그들을 구출하는 것이다. 납치범들에게 돈 주는 것을 창피하게 여기지 말라는 미국인 전문가 랜디 스파이비의 충고가 소중하게 들린다(조선일보 인터뷰).

우리의 선택은 아프가니스탄 정부와 협의하면서 미국의 물밑 지원을 받아 내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을 압박하면서 미국을 조용히 설득하는 성동격서(聲東擊西)가 답이다.

인질과 탈레반 포로 맞교환, 그리고 돈으로 인질을 석방시키는 데 대한 미국의 '묵인'을 끌어내야 한다.

우리는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비전투 부대를 파병했다. 그 때문에 납치와 테러의 표적이 됐다. 한국인 인질들의 석방이라는 절박한 목적을 위해 미국이 납치범과는 거래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유연성을 갖고 아프가니스탄 정부에 '고 사인'을 보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우리는 워싱턴의 그런 사인이 이미 카불에 전달되었기를 바란다.

사건 초기에는 탈레반과 줄이 닿는 지방 토호들의 중재가 효과적일 수 있었다. 그러나 사태가 장기화되고 세계적인 이슈가 되면서 면허 없는 브로커에 매달릴 수는 없다.

김영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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