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보도 4·19계기 모습갖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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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3·15 부정선거가 도화선이 된 4·19는 이승만대통령의 하야와 1년뒤의 5·16 군사쿠데타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회적 격변을 낳은 정치적 사건이었으나 한편으론 방송보도가 제자리를 찾게되는 계기가 된 사건이기도 하다. TV가 없었던 4·19 당시엔 방송사라야 KBS라디오·CBS· 부산MBC라디오 셋밖에 없었다. 더욱이 그 무렵은 CBS도 서울 본사에 이어 기술요원 2명으로 대구지국을 막 개국했을 때로 보도과가 없어 간단한 교계 소식 외엔 모든 뉴스를 KBS라디오나 VOA (미국의 소리:미국 국무부가 정책 홍보를 위해 전세계에 하는 방송)를 받아 보도하고 있었다. 따라서 자체적인 방송보도는 KBS·부산MBC의 두 보도과에서만 이뤄졌다.
그러나 당시 KBS는 4·19로 세상이 들끓고 있는데도 이에 대한 보도를 거의 하지 않고 정부에 의해 완전 통제된 상태에서 정부의 정책을 홍보하는 메신저 역할만 하고 있었다.
결국 당시 근대적 의미에서의 언론 역할을 하던 방송보도는 부산MBC 하나밖에 없었던 셈이다.
서울MBC보다 2년7개월 앞선 59년4월 최초의 상업방송으로 개국한 부산MBC는 상업방송답지 않게 오락프로보다 보도프로에 역점을 두었다.
부산MBC가 보도기능을 강화한 것은 남달리 진보적인 언론관이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당시 MBC 보도과장이었던 전응덕씨 (현광고단체연합회장겸 KBS이사)는 『청취율을 올리기 위해선 마땅히 오락프로를 많이 만들어야 하지만 당시 사정으로는 성우를 구하기 어려위 할 수없이 보도쪽으로 기울었다』고 그 배경을 설명한다.
이러한 사정 아래 부산MBC는 「최루탄에 희생된 마산상고생 김주열군 시체발견」을 특종보도함으로써 우리나라 방송보도사의 한 획을 긋게 된다.
부산MBC는 관제매체인 KBS라디오밖에 없었던 개국당시 상황에서 현장보도 자체가 상품성이 있다는 판단아래 20분짜리 시사보도프로그램 「라디오브리지」등을 통해 공정성을 갖춘 새로운 스타일의 뉴스를 공급하면서 근대적인 방송보도의 노하우를 쌓았다.
부산MBC는 개국 1년동안 쌓은 방송보도 노하우로 김주열군 사건을 특종보도하면서 보도의 공정성·현장감등 방송보도가 지녀야 할 기본적인 요건들을 제대로 갖춰 내보내는 개가를 올렸다.
방송이 보도매체로서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던 당시 상황에서 김주열군 사건 특종보도는 또한 방송의 속보성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구체적으로 입증해준 최초의 사례로 의의가 크다.
뿐만 아니라 당시 보도책임자이던 전씨는 부산중부서장의 집요한 압력에도 불구하고 4·l8 고려대생 시위현장의 함성을 담은 테이프를 방송해 경남지역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부산MBC의 4·19 공정보도는 4월27일 KBS 아나운서들의 중립화선언을 이끌어 내는등 우리나라 방송보도전반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켜 오락 기능 위주의 「소리통」에서 오락·보도가 종합된 매체로 국민들의 방송관을 바꿔 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한편 방송위원회가 발행하는 방송 전문 월간지『방송과 시청자』는 「4·19시대의 보도국 이야기」를 4월호부터 30회에 걸쳐 연재, 우리나라 방송보도 발전 과정을 정리할 계획이다. <남재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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