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수 2000 돌파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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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피지수 2000을 돌파하기까지 한국 증시는 그야말로 역경의 길을 걸었다. 지수 1000에 올랐다가 무너지기를 다섯 차례나 반복했다. 증권가에선 10년 넘게 "한국 증시는 지수 1000이 한계"라는 자조 섞인 말이 정설처럼 굳어지기도 했다.

기업의 실력을 따지는 건전 투자보다 '돈 놓고 돈 먹기'식 투기판으로 증시가 변질됐기 때문이다. 쉽게 달아올랐다 식는다고 '냄비 증시', 남이 사면 나도 산다고 '묻지마 투자', 걸핏하면 투자금을 모두 날린다고 '깡통계좌' 같은 말들이 증시 유행어가 됐다.

이때까지 전형적인 개발도상국 증시의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한국 증시는 1997년 외환위기를 맞아 이듬해 6월엔 지수가 280까지 곤두박질하기도 했다.

'한국 증시호'는 56년 3월 서울 명동에서 '대한증권거래소'라는 이름으로 출범했다. 첫 거래 종목은 조흥은행과 한국상업은행 등 12개사였다. 상장 기업이 부족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지수는 없었다.

주식 투자가 대중화의 길을 걸은 것은 70년대 후반부터. 당시 중동에서 건설사들이 오일 달러를 벌어들이자 건설주가 급등, 회사 이름에 건설자만 들어가면 주가가 뛸 정도로 '묻지마 투자'가 성행했다.

'증권가=여의도'로 이어지는 여의도 시대는 79년에 시작됐다. 80년대 후반 싼 유가, 낮은 금리, 엔저(低)의 '3저 호황' 증시도 훌쩍 컸다. 경기가 좋아지면서 시중에 넘쳐난 돈이 자연스레 증시로 몰린 것이다.

증권선물거래소 옥치장 유가증권시장 본부장은 "금융.건설.무역 관련주 등이 '트로이카 장세'를 이끌며 투자자들을 증시로 불러 모았다"고 당시를 돌아봤다.

종합주가지수(현 코스피지수)는 83년에 도입됐다. 80년 1월 4일을 '100'으로 삼아 환산한 지수였다. 서울올림픽이 끝난 89년 3월 말에는 처음으로 1000고지를 돌파했다. 이후 물가 불안과 고유가로 세계 경기가 가라앉으며 국내 증시도 내리막길을 걸었다.

반도체 호황으로 잠깐 활력을 되찾았던 증시는 97년 외환위기로 '쑥대밭'이 되다시피 했다.

외환위기는 한국 증시의 체질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외국인에게 증시를 전면 개방하고, 선물과 옵션 같은 파생상품 거래를 시작했으며, 기업의 회계 투명성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렸다.

이후 외국인 투자자들은 시가총액의 40%를 움켜쥐며 큰손 노릇을 하고 있다. 코스피 지수의 대세 상승은 2003년 3월부터. 2005년 9월 7일엔 1142.99 로 마감, 11년 만에 직전 사상최고치를 갈아치웠고, 이후 한두 차례 조정은 겪었지만 올 4월 9일 1500선을 첫 돌파하는 등 사상 최고치를 계속 경신하면서 이날 지수 2000을 마침내 돌파했다.

최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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