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절을 넘어서는 역사만들기/이어령(시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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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클린턴 미 대통령은 고교생시절,대표로 선발되어 백악관을 방문한다. 그리고 케네디대통령을 만나 악수를 나눴다. 그리고 30년 뒤 이 때의 장면을 찍은 비디오테이프가 선거전에 등장하여 결정적 역할을 하게된다. 이러한 이야기는 우리나라에서도 모를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이 한국에서 일어나게 되었다면 어떠했을 것인지를 가정해본 사람은 그렇게 흔치 않을 것 같다.
○기록 잘않는 한국인들
우선 우리의 경우라면 거물정치인도,외국의 국빈도 아닌 고교생들의 예방인데 그런 장면까지 일일이 영상으로 기록했을까 하는 회의가 생길 것이다. 우리도 옛날 사관들이 역사적 사실들을 세세하게 기록해왔고 『승정원일기』처럼 조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적어왔던게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나라의 경우와 비교해 보면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개인이든 집단이든 기록을 잘 하지 않는 편에 속한다. 가령 중국의 경우 돈황근처에서 1만개 가량의 목간이 발굴되었는데 그것은 한나라때 관리가 2백년동안 매일같이 「오늘도 아무 이상 없음」이라고 쓴 기록이었다고 한다. 이상이 없으면 기록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5,6대에 걸쳐 그 똑같은 기록을 꾸준히 써왔던 것이다. 우리와는 달리 하루하루 장부를 적은 조오닝(상인)문화가 몸에 배어있는 일본인들의 경우도 중국인 못지않다.
다음에는 보관성이다. 설령 기록을 남겼다 하더라도 우리의 경우 그것을 잘 보관했겠는가라는 두번째의 의심이 생긴다. 클린턴대통령의 경우에는 국립자료보관소를 통해 그 비디오테이프를 간단히 구해왔지만 우리의 경우라면 바다에 떨어진 좁쌀 한알을 찾기보다 힘이 들 것이다. 보관만이 문제가 아니다. 비디오테이프는 물론 필름으로 된 영상자료라 해도 수명은 60년 밖에 되지않는다. 프랑스의 국립필름보관소 같은데서는 수십억원의 비용을 들여 연간 5백t의 필름을 특수 보관처리하고 있다. 책조차도 영구적인 보관을 위해 중성지를 사용하고 있는 경우도 많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후진적인 분야가 있다면 바로 이 자료보관시설과 그 기술이라 할 수 있다. 웬만한 기관에는 아카이브가 설치되어 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그 말조차 들어본 사람이 없을 정도다.
○과거 부정의 역사탓
세번째는 지속성이다. 그 기록도 남아있고 보존과 관리도 잘되어 있어 우리도 30년전 대통령과 악수를 나누는 비디오테이프를 구했다고 하자. 그러나 우리의 경우 과연 그런 장면의 자료가 선거운동에 어떤 도움을 줄 것인가. 가령 청와대를 방문,박정희대통령과 악수한 고교생 대표가 대통령 입후보자가 되었을때 아마도 그 비디오 테이프는 득표가 아니라 오히려 표를 잃게 할는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 사회와 역사는 지속형이 아니라 단절형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인물과 그 역사를 부정하고 매도하는 것으로 새 역사의 동력을 삼아왔다. 그러나 대만에서는 새 총통이 취임선서를 할때 손문의 사진을 걸어놓는다. 중국이나 대만은 사회체제가 서로 달라도 손문선생을 다같이 근대화의 아버지로 섬긴다. 좋든 궂든 만세일계라는 천황을 모시고 살아가는 일본인의 경우에 있어서는 두말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이들의 역사는 부챗살같은 구심점과 강물처럼 흘러가는 지속성을 지니게 된다.
그러고 보면 아시아에서 역사의 단절성이 가장 깊은 곳이 한국이다. 해방이 되었을 때는 친일파,동란이 일어났을 때는 반동과 부역자,그리고 군사혁명이 일어나면 반혁명분자와 부정축재자,그리고 요즘엔 기득권자다. 과거란 모두 더럽혀진 손이므로 그러한 손과 악수한 비디오 테이프가 있으면 찾는 것이 아니라 나올까봐 두려워 감춰야 한다. 과거의 시간들이 기록되고 보관되고 지속되기를 원하는 사람 보다는 그 현장에 있지 않았다는 부재증명을 얻기 원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기록은 한 민족의 기억
거의 한세기동안 내려온 이 단절의 역사는 분단의 역사보다도 그 골이 깊고 어둡다. 기록성과 보관성과 지속성은 한 민족의 기억인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의 광속에서 문화가 생겨난다. 단절의 역사속에서는 기록성이나 보관성이나 지속성에 대한 인식이 생겨날 수가 없다. 30년 뒤 오늘의 우리 고교생이 대통령후보가 되었을때 클린턴대통령처럼 낡은 비디오 테이프 하나를 찾아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도록 단절을 넘어서는 역사 만들기에 모든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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