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대신 인간·자연으로 소재 전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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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달관·초월의 시들이 늘고 있다. 지난 세대 자신이 발딛고 사는 정치현실·도시문명을 괴롭게 물고 늘어지던 시인들이 하염없이 동양적 사상이나 자연·유년으로 돌아가고 있다. 세상이야 어떻게 굴러가든 정신·자연·개인세계에 몰두, 수신득도하려는「소승적 시인」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칼을 입에 물고 노래하는 가인을/오래 머물게 하라. /절복의 시대가 온다. /삶과 망치와 깃대는/땅속 깊이매장하고, 삭풍 앞에 나서/입에 문 칼끝을 삼키면서/스스로를 증명하는/절복의 시대가 온다.』(『산정묘지:5』중)
「망치와 깃대.]로 사회변혁의 구호를 앞세운 민중시, 그와 정반대에서 후기산업사회에 동승한 타락한 시들만이 판치던 80년대 현실과 삶을 털어버리고「칼을 입에 문채」정신의 정점만을 노래하던 조정권씨가『산정묘지』연작으로 91년도 소월시·김수영등 양대 시문학상을타면서 시단은 소위「정신주의」로 급속히 쏠리기 시작했다.전통 서정시인·도시문명시인·민중시인등이 그 유파와 경향을 초월해 모여들며 이제 정신주의가 시단의 큰 흐름을 이루자 문예지들이 앞다퉈 이에 대한 점검에 나서고 있다.
『현대시』4월호가 마련한 기획특집「우리시와 정신주의」에서 문학평론가 최동호씨는『정신주의는 90년대 시의 방향상실에서 촉발된 것으로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한 해체적·탈이성주의 시들이 자기방기적·허무적 경향으로 기울어지는데 대한 비판적 시각에서 정립됐다』며 정신주의의 시대적 당위성을 설명한다.
같은 특집에서 윤호병씨(육사교수)는『정신주의는 시대정신을 집약할수 있어야 한다』며『그것이 자칫 골머리 아픈 속세를 저버리는, 현실도피를 위한 가장이어선 곤란하다』고 정신주의가 빠지기 쉬운 탈역사·현실을 경계했다.
한편『현대시학』4월호에 실린 특집대담「우리시의 전통사상과 오늘의 우리시」에서 조동일씨(서울대교수)는『우리 전통적인 시정신의 핵심은 시와 사의 합일에 있다』고 보았다. 신라 최치원의 시에서부터 망국에 저항, 순사한 황현의『절명시』에 이르기까지 사물과 개인적 깨달음을 넘어 시대의 사명에대한 커다란 깨달음으로 일관해온 것이 우리의 시정신이라는게 주초씨의 설명이다. 득도의 정신과 반성을 통해 역사적사명과 깊이 대화를 나눌수 있는 전통적 시정신이 어느때보다 긴요함에도 불구하고 요즘 나온 정신주의 시들은『역사나 자신과의 피나는 대결속에서 나오는 큰 깨달음이 없는 감각적·수사적 사이비유사품들이 많다』고 조씨는 비판했다. 개혁정국아래서 지친 80년대 민중주의 시인들의 대책없는 도피처로서, 혹은 서정·감상·권위주의자들의 고상한 취향정도로「정신주의」가 오도돼서는 안된다는 지적들이다.

<이경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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