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정부,업무에 정통한 전문인 워촉키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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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정부투자기관 이사장만큼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자리」도 극히 드물다.
이 제도가 도입된 후 9년동안 새 이사장이 들어설 때마다 이에 대한 논란은 어김없이 되풀이됐다.
지난해 7월에는 5공실세 였던 권정달씨가 산업은행 이사장으로 선임되자 이사장제는 또 한차례 따가운 눈총에 시달렸다.
여론은 끊임없이 이사장폐지쪽으로 모아졌고 김영삼 새 정부가 들어서자 이에 대한 기대는 더욱 커졌다.
그러나 새 정부는 최근 일련의 개혁조치와는 별개로 이사장제에 대해서는「잘못된 부분은 고친다」는 전제아래 그대로 존속 시키기로했다.
이사장제는 무엇이 길래 이처럼 정권의 부심과도 상관없이 끈질긴「생명력」을 과시하고 있는 것일까.
이사장제가 처음 선보인것은 지난 84년4월. 정부는 정부투자기관의 집행기구와 의결기구를 분리해 경영의 효율을 높인다는 목적으로 정부투자기관 관리 기본법을 고처 이 제도를 도입했다.

<새정부서도 존속>
정부투자기관도 민간기업과 마찬가지로 자율적으로 경영을 하도록 해야 할텐데 자칫 우려되는 집행부의 방만한 경영을 견제하기위해 이사장제 도입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같은「홑튱한」목적에도 불구하고 이 제도는 좀처럼 시비의 대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지난 9년동안 이사장을 지냈거나 현재 맡고 있는 사람은 총88명. 이 가운데 전지장· 차관 출신이 40%인 35명, 군장성 출신이 34%인 30명(군출신으로 장·차관이나 국회의원을 지낸 사람을 합하면 숫자는 더욱 늘어남), 정치인 출신이 20%인18명으로 거의 건부를 차지했다.
결국 「퇴역들의 안식처」가 된게 논란의 발단이었다.
물론 예외도 없지는 않았다. 산업은행은 권정달씨 전에 강경식(전재무장관)· 정영의(전재무장관)씨가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중소기업은행은 나웅배(전부총리)·최창낙(전한은총재)씨가,국민은행은 김종인(전청와대경제수석)· 안승철(전중소기업은행장)씨가 각각 이사장을 맡아 경력과 직책이 비교적 잘 어울리는 조합을 이뤘다.
그러나 대부분의 정부투자기관은 전문분야와 전혀 상관없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석탄공사는 김윤호(전합동참모본부의장)· 고광도(전육군참모차장)· 정관용(전내부부장관)· 리관영(육사13기· 전건설부차관)씨등 군장성 출신과 전직 고위관리가 경력과 관계없이 이사장직을 독차지했고 광업진흥공사는 조문환(전국방부차관)· 김용금(전에너지관리공단이사장)· 정진권(전합참의장)등 군장성 출신으로 대물림했다.

<한달 한두번 출근>
정부투자기관 이사장은 비상근이다. 너무 자주 출근하면 사장을 비롯한 임직원들에게 눈총을 받기 때문에 한달에 한두번「적당치」출근 해야한다.
사장과 사이가 좋지 않아 이사회때 번번이 부닥친 이사장도 없지 않았으나 대부분이 이사회를 주재하면서 사장이 주문하는대로 방망이를 두들겨 주어야 점잖다는 평을 받는다.
그러면서도 월 2백만원의 판공비와 비서가 딸린 사무실, 운전기사가 포함된 진용승용차를 제공받는다. 사장과「돈독한 관계」에 있으면 별도의 비용도 지원받을수 있다.
특별히 하는 일은 없어도 품위를 유지하면서 공적· 사적활동을 할수있는 공간은 확보할 수 있는 셈이다.
이때문에 여론의 따가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이사장자리는 경합이 치열하다. 그렇다고 이사장이 모두 똑같은 수준의 예우를 받은 것은 아니다.
윤필용씨는 전매공사에서 담배인삼공사에 이르기까지 이사장직을 세번이나 연임했다. 수경사령관으로 박정희대통령시절 한때 대단한 위세를 떨쳤고 전두환· 노태우전대통령과의 특수관계 때문에 여느 이사장과는 대접의 차원이 달랐다.
그는 김영삼대통령 취임직후 가장 먼저 사표를 제출하면서 이사장제의 불필요성을 강조,주변을 어리둥절 하게 했다.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 김명윤이사장은 김대통령과 불가분의 사이다. 3공말기부터 김대통령이 어려움을 겪던때 언제나 곁에 있었던 민주산악회 회장 출신이다.
그는 14대 총선때 민자당전구구 공처에서 탈락된후 무역진흥공사 이사장이 됐다. 그러나 과거 노대통령 시절과 현재 김대통령의 등장이후를 비교할때 그의 위상은 크게 달라졌다.
오비이락격이지만 그가 이사장으로 있는 무역진흥공사의 김철수사장이 상공자원부장관이 됐다.

<대통령 측근 많아>
이사장 가운데는 이 자리가 결코「퇴역의 안식처」가 아님을 증명해 보인 사람도 적지않다.
나웅배씨는 중소기업은행이사장을 지낸뒤 부총리격 경제기획원장관이 됐으며 그후 국회의원에 당선, 민자당정책위의장을 역임하는등 여당의 중추역할을 하고 있다. 국민은행 이사장을 지낸바있는 김종인씨는 그뒤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이 되어 노태우정부의 경제정책을 맡아 요리했으며 지금도 현역국회의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이선기씨는 대한무역진흥공사 이사장에서 사장으로 변신, 러시아와 동구권등 북방통상의 길을 여는데 한몫을 담당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이사장직을 끝으로 현역에서 물러났다. 새 정부는 이사장제에 대한 그동안의 여론을 수렴, 앞으로 이사장은해당기관의 업무에 정통한전문인 가운데서 뽑되 판공비·비서·자동차등을 제공하지 않을 계획이다.
정부 고위관계자는 이런조건으로 대상자를 고르다보니 고사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사장이란「자리」의 매력은 아무래도 하는 일에 비해 대우를 융숭하게 받는데 있는 것 같다.

<한종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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