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국정원은 지금 몇 시에 있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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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대선 유력주자의 개인정보 유출과 관련해 국정원이 모종의 역할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논쟁으로 여론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국가안보, 인권침해, 정보의 사적 유출, 국정원의 선거 개입, 부정부패 등 본 사안을 가로지르는 앵글이 너무도 다양하므로 어느 하나의 입장에서 상황을 정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사안의 핵심은 국정원이 주장하는 ‘국가안보’적 해석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있다. 짐작하건대 대선 후보로 거론되는 고위공직자의 재산 관련 비리 의혹은 국가안보를 위한 사회안정을 위협할 수 있으므로 이에 대한 정보활동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설명인 것 같다. 결국 작금의 논쟁은 대선 유력주자를 포함한 고위공직자에 대한 국정원의 자료 수집·생산이 국가안보의 시급성에 해당하는 사안인지에 대한 판단으로 귀착된다.

미국의 경우 정보가 국가안보와 사활적인 연결을 맺게 된 것은 살얼음판 같던 미·소 간 전후 화해의 시기가 끝나고 냉전적 대결이 첨예화하기 시작한 1947년부터다. 당시 트루먼 대통령처럼 장래 정보기관의 비대화를 우려하는 이도 많았지만 소련과의 대결은 국내외 모든 정치 현황을 설명하는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였다. 특히 국제무대에서 글로벌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 미국의 경우 중앙정보국(CIA)과 같은 정보기관의 존재가 국가이익에 필수적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미국의 경우 국가정보 활동이 철저하게 기능적 분화가 이뤄져 있다는 점에서 우리 국정원의 통합적 기능과는 거리가 있다. 기본적으로 해외정보와 대외정책, 국내안보와 수사, 국방 관련 정보와 정책 수립 등의 카테고리에 따라 CIA, 연방수사국(FBI), 그리고 국방정보국(DIA)의 역할이 분명하게 구분돼 있다. 또한 전통적인 분류법인 첩보 수집 방법에 따라 인간정보·암호정보·영상물정보 등으로 정보기관 간 분업구조가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우리의 국정원은 이 모든 기능을 독점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물론 우리의 경우 대 북한 업무의 특수성에서 기인하는 국정원 정보활동의 포괄성이 어느 정도 인정된다. 그러나 그것은 엄격히 적용돼야 한다. 지금처럼 국정원이 결과적으로 대선 후보에 관한 개인정보를 수집한 것은 국정원의 업무 영역과 무관해 보일 뿐 아니라 국정원의 정치개입 의혹이라는 부작용을 낳게 된다. 부정부패 관련 첩보수집을 정보기관의 통상적인 업무로 인정해야 한다는 국정원의 주장은 어디까지나 관련 업무가 다른 사법기관(검찰·경찰)이나 행정부처(감사원·국세청·경제 관련 부처)와 효과적으로 분화돼 있을 때에만 호소력이 있다. 국제화 시대에서 국내와 해외 정보를 획일적으로 가르는 게 어렵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의 국정원은 해외·대북 정보에 주력하고 통상적인 내정과 관련한 정보는 다른 국가기관과 효율적으로 공유하거나 아니면 그들에게 이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회수(淮水)를 건너면서 탱자가 되어 버린 귤처럼 국가안보를 위한 미국 정보기관의 기능적 발달이 태평양을 건너 우리나라에 오면서 냉전형 국가권력의 상징물이 돼 버렸다. 지금 우리 사회의 시계는 모두가 갈망하는 선진화와 세계화를 향해 분초를 다투며 달려가고 있다. 그런데 정보의 첨단에 있다는 국정원은 몇 시에 와 있는가.

박인휘 이화여대 교수·국제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