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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상인들 짐 가벼워져 큰일”

중앙일보

입력

이코노미스트 "초보자도 환영". 1978년 안인준(60)씨는 서울시에서 개인택시 면허를 추첨한다는 문구를 봤다. 당시는 중동 건설 붐이 일었을 때. 한창 일할 젊은이들이 사우디아라비아 등지로 떠나 서울 시내를 책임질 버스나 택시 운전기사가 부족했다. 구자춘 전 서울시장이 장롱면허를 구제해 준 셈인데, 별다른 조건 없이 개인택시 면허를 내준다는 것이었다.

그에겐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직접 개인택시를 몰지 않아도 프리미엄 100만원을 붙여 팔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의 나이 서른한 살, 당시 삼립빵 대리점 사장의 기사였다.

“제가 첫 번째 당첨자입니다. 그냥 팔아버릴까 하다가 누군가 그러더군요. 자기 사업을 해야 돈을 벌 수 있다고. 제 첫차는 기아 브리샤였습니다. 가격도 잊지 못합니다. 216만원이었습니다.”

그는 돈을 벌어야 했다. 막 태어난 쌍둥이 자매가 1.7kg, 1.5kg으로 인큐베이터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자가용 운전해 한 달에 5만원을 버는데 하루 병원비만 2만원이었다.

“전세금 20만원을 빼서 병원비로 털어 넣어도 열흘밖에 못 버티지 않습니까. 아이들을 9일 만에 병원에서 데려온 날, 결국 모시던 사장님을 찾아갔습니다. 통장과 도장을 주시더군요. 빌린 돈으로 택시를 샀고 아픈 아내 대신 매일 뜨거운 물에 분유를 타놓고는 택시에 올랐습니다.”

통행금지 제도는 그에겐 하늘이 준 기회였다. 택시는 특별히 밤 12시30분까지 길에 돌아다니는 게 허용됐는데 그때부터 통금이 해제되는 새벽 4시까지 노루잠을 잤다. 그러고선 새벽 4시부터 다시 밤까지 계속 서울 거리를 누볐다. 그 결과 3부 이자를 주고서도 6개월 만에 200만원을 갚을 수 있었다. 2년 반 만에 신림동에 13평짜리 집도 마련했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는 택시의 인기가 좋았습니다. 서로 타려고 야단이었으니까요. 엄지손가락을 펴면 서울시내, 검지손가락을 펴면 주요 역전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손가락을 보고 방향이 같으면 합승을 했죠. 그때는 합승이 지금처럼 불법이란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성장의 기운이 꿈틀대던 80년대 초반을 그는 택시의 전성기로 기억했다.

“어떤 신문에서 최고의 신랑감 4위가 개인택시 운전기사라고 합디다. 그러나 전 지금 젊은 사람이 운전한다고 하면 말립니다. 이게 비전이 있습니까? 처자식 밥 벌어 먹이기도 힘들고….”

그러나 안씨는 그때 알뜰살뜰 잘 모아둔 택시기사는 지금쯤 최고의 시아버짓감이 아니겠느냐며 웃었다. 돈벌이가 시원찮아 진 것은 노태우 대통령이 집권할 때부터다.

“요즘이 제일 힘들죠. 1980년대 후반부터 흔한 말로 벌이가 서서히 ‘꺾였죠’. 그 뒤로 계속 나빠지기만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현재가 최악이죠.”

30년 세월 동안 가장 많이 준 계층은 시장 상인 승객이다.

“중부시장, 청계천, 남대문 같은 곳은 원래 손님이 많아야 합니다. 상인들이 돈 좀 쥐어보십시오. 팔 물건들을 더 구매할 것이고 짐이 크고 무거워 택시를 타게 돼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어떻습니까? 상인들은 택시를 타지 않고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합니다. 더 이상 보따리가 크거나 무겁지가 않으니까요.”

또 기사식당의 점심가격도 낮아지고 있다.

“4~5년 전부터 2500원, 3000원 하는 밥집이 생겨났어요. 택시기사들이 가장 많이 먹는다는 돼지불고기 백반을 3000원이면 푸짐하게 먹을 수 있어요. 아마 요즘엔 손님이 없어 5000원짜리 설렁탕을 가벼운 마음으로 먹는 운전기사는 없을 거예요.”

장안동 일대에 싸고도 맛있는 집이 많다고 덧붙였다.

“잘나갈 땐 하루 주행거리가 600km까지도 됐는데, 지금은 그 절반도 못해 200km를 뛰고 있습니다. 물론 제 나이가 들고 체력이 달리는 면도 있죠. 하지만 빈 차로 다니는 시간이 절반이 넘을 때도 있으니 경기가 안 좋다는 얘기겠죠?”

그는 개인택시 몰면서 자식 셋을 대학 보내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아이들 대학 갈 때 통장을 깼습니다. 그리고 집도 팔았습니다. 하루에 평균 16시간씩, 게으름 피우지 않고 일한 결과, 3층집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돈 갚기 힘들더라고요. 결정적으로 집을 판 것은 빚에 휘둘리니 돈 버는 재미가 없어졌기 때문이죠. 집을 줄이고 매일 매일 돈 모으는 재미를 택했어요. 요즘엔 유지비 제하고 생활비 제하면 어디 남는 게 있어야지….”

그는 IMF 외환위기 당시 기름값이 확 뛴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 영업용 택시는 모두 LPG를 쓰는데, 휘발유와 마찬가지로 LPG값도 많이 올랐습니다. 78년에는 휘발유가 ℓ당 190원 정도…가스는 거의 공짜나 다름 없었습니다. 저는 85년께 각서를 쓰고 휘발유차를 LPG차로 바꿀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흔한 가스충전소지만 그때는 드문드문 있었죠. LPG는 싼 줄 아는데 연비가 휘발유만큼 좋지 않아 가스도 휘발유만큼 비싸죠.

어디 그뿐입니까? 타이어 가는 것, 엔진오일을 한 달에 한 번 갈아주는 것까지 하면 보통 하루에 번 돈의 3분의 1은 유지비로 나가게 돼 있습니다. 꺾어 쓰는 미터기 기억나십니까? 그건 몇 만원했는데, 요즘엔 32만원 합디다. 자동차도 워낙 첨단 장비가 되다 보니 수리·유지비가 가파르게 오르고 있습니다.”

‘택시기사 왜 어려워졌나’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던 그는 “뭐니뭐니 해도 택시가 많은 게 가장 큰 이유”라고 말했다.

“‘정 안 되면 운전이라도 하지’라는 말도 안 되는 말들을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외환위기 때만 해도 명퇴 당하고 사업 망해서 택시업계로 온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나라 택시가 몇 대입니까? 서울에 개인택시만 4만9000여 대라고 합니다. 제 번호가 9228번인데 그 뒤로 4만 명은 더 생겼다는 거죠. 도쿄에는 4만5000대 정도라는데 한숨이 나옵니다. 회사택시까지 합하면 서울에 왜 그리 노는 택시가 많은지 알 만한거죠. 택시 50대에서 100대 남짓 굴리는 운수업체가 200여 개가 넘으니….”

그는 그 많은 사람이 똑같이 택시에 목을 맬 수밖에 없었던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지난 10년, 길거리로 내몰린 사람들은 많았지만 손님은 줄었다.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부지런히 뛰는 것.

“손님을 제가 찾아다녀야죠. 기사들 말로 가만히 한 군데서 기다리면 지역택시, 돌아다니면 전국택시라고 표현하는데 전 전국택시죠. 공항 앞에서 3~4시간 죽치고 있다가 손님이 겨우 ‘공항입구까지 가자’고 하면 얼마나 허무합니까.”

여기저기 다니다 보니 손님 얼굴만 봐도 목적지를 알 수 있다고 한다.

“예전엔 넥타이 맨 손님들은 광화문 시청 방향, 요즘은 대개 여의도죠. 예전엔 점퍼 입은 손님은 중부시장 가는 분이 많았는데 요즘엔 용산이 주목적지죠.”

굳이 자주 다니는 지역을 꼽으라면 그는 강북이란다. 강남은 평일이나 주말이나 길이 막히기 때문이다.
“한강다리만 건너면 길이 뚫렸는데, 삼각지 지나도 아직도 길이 막히니… 원. 옆에서 버스가 잘 달리는 거 보면 이래서 누가 택시 타겠나 싶기도 합니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대중교통시스템을 잘 만들었나 싶어도 “택시기사에겐 영 불리하다”는 게 그의 말이다.

“밤 1시까지 버스나 지하철 이용할 수 있으면 택시 타겠습니까? 서민들에겐 좋은 듯해도 우리도 서민이니 딱히 잘했다 못했다 말하기 어렵습니다.”

택시가 고급의 대중교통수단이라면 처음부터 이렇게 많아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이제는 손님들 찾아다녀”

“기사 스스로 제복도 갖춰 입고 친절하게 손님을 모셔야죠. 서비스 정신에 대한 교육도 없이 택시 면허를 내주다 보니 정말 ‘아무나’ 택시 운전하는 것으로 아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엔 25년 무사고로 경찰청에서 상도 받았다.

“그런데 말입니다. (시계를 보여주며) 못 쓸 것을 줬더라고요. 끈이 벌써 너덜너덜해졌습니다. 박 대통령 시절엔 산업시찰도 보내줬는데, 정부가 돈을 아끼는 건 좋은 현상이죠? 그런데 참 이상한 건 30년 무사고 포상은 없다는 거예요. 고작 25년 하고 말란 얘기인지…. 무엇을 하든 30년을 하면 장인의 반열에 오를 준비가 된 것 아닙니까?”

그러나 ‘장인’ 수준의 택시운전기사라도 이럴 땐 속수무책이다.

“또 시위냐? 하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도대체 언제부터 서울에 시위가 이렇게 많아졌습니까? 다 좋은데 꼭 도심에서 해야 하는지…. 택시는 바쁜 사람들이 버스 타는 돈에 웃돈을 얹어 타는 것인데 말입니다. 저 같아도 가만히 앉아 미터기 올라가는 꼴은 못 보죠.”

손님이 참지 못하고 내리면 도로에 샌드위치 된 상태로 갇혀 있어야 한다는 점도 문제다.

“길 위에서 먹고사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저 같은 택시 운전기사도 있지만 용달차, 덤프트럭 운전사도 있고 비즈니스를 위해, 공무를 위해 한시가 급한 사람들 역시 저처럼 길 위에서 먹고산다고 생각합니다. 나라가 잘되려면 길 위를 누비는 사람이 많아져야죠.”

위기의 택시업계. 택시는 누가 먹여 살릴까.

“원래 택시는 여성들 때문에 먹고산다는 말도 있죠. 시장 보고 오는 아주머니들이 짐이 무거워 택시를 이
용하는 경우도 많지만 일하는 여성들이 바빠서 타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특히 장거리 손님은 여자가 많다.

“천호동에서 상계동까지 가면서 줄곧 휴대전화만 하는 겁니다. 나중엔 슬슬 걱정이 되더라고요. 저 휴대전화 요금은 어찌 감당하나 싶어서 말입니다.”

그는 무엇보다 개인택시의 오너는 여성이 돼야 한다고 믿는다.

“개인택시기사 중에 어제 과음했다는 핑계로, 비가 와서 일 안 나가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제가 CEO라도 오너는 부인 아니겠습니까? 매일 약속한 돈을 가져다 줬습니다. 죽어도 처자식은 먹여 살리겠다는 마음으로 30년을 달린 것 같습니다.”

그 덕인가. 장남은 검사로 있다는 자랑도 잊지 않는다. 착한 며느리에 듬직한 사위들을 얻었으니 바랄 것도 없다.

“30년 택시 운전한 사람 주변에 많습니다. 그런데 고작 30년이 뭡니까? 경력이 50년은 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든까진 달려야죠.”

2007년 7월 11일. 개인택시를 시작한 지 꼭 30년이 되는 날이다. 그날도 어김없이 그는 12시간을 꼬박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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