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노트북을열며

남북기본합의서를 되살리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6면

  한반도 정전체제 종식과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구상이 봇물 터지듯 나오고 있다. ‘2·13 합의’에 따른 북한 핵시설 폐쇄가 가시화하자 속도도 붙었다.

 북한은 13일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를 위한 북·미 군사회담를 열자고 제의했다.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는 지난 11일 “한반도 평화체제 협상 과정을 올해 안에 시작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심지어 한국국방연구원(KIDA)은 “평화체제 논의에서 북·미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정부가 8·15 등을 계기로 종전 선언을 주도적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내놨다. 일종의 경쟁 양상마저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논의는 지난해 11월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의 하노이 발언이 기폭제가 됐다. 부시 대통령이 당시 한·미 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에게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포함한 세 사람이 함께 종전 선언을 하는 방안을 추진할 수 있다”고 밝힌 게 계기가 된 것이다.

 그 후 미국은 “북한의 비핵화를 포함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문제를 부시 대통령 임기 내에 마무리하고 싶다”는 의사를 여러 차례 표명했다. 이런 제안과 구상만 놓고 보면 한반도 평화에 서광이 비치는 듯하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너무도 냉혹하다. 북한의 핵문제를 비롯한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은 여전히 심각하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된 뒤 54년 동안 다양한 평화체제 논의가 있었다. 하지만 남북 간의 군사적 대치는 본질적 측면에서 변화가 없다.

 이 시점에 우리가 꼭 집어봐야 할 게 있다. 한반도 평화체제에 대한 큰그림보다 중요한 게 남북 간의 군사적 신뢰구축이라는 점이다.

 남북한은 1991년 12월 13일 역사적인 문서에 서명했다. ‘남북기본합의서’가 그것이다. 분단된 조국의 평화적 통일에 대한 염원을 담은 문서인 남북기본합의서에는 평화체제 구축을 비롯한 통일에 이르는 길이 망라돼 있다.

 남북기본합의서 체결 당시 한반도 전문가들은 “합의서대로 이행만 되면 통일이 될 수밖에 없다”고 밝힐 정도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2002년 6월 남북 정상회담을 위해 방북하기 직전까지 “남북기본합의서를 되살리겠다”고 강조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럼에도 북한의 이행 거부로 남북기본합의서는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다. 90년대 초반 동유럽권 붕괴로 위기의식을 느낀 북한이 합의서엔 서명했으나, 상황에 몰려서 합의했다는 생각 때문에 이행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남북기본합의서를 되살려야 한다. 남북기본합의서 제12조에는 ‘남북군사공동위원회’ 구성을 명시해 놓았다. 남북군사공동위원회에서는 대량살상무기(WMD)와 공격 능력의 제거를 비롯한 단계적 군축 등을 실현하기 위한 문제를 협의토록 했다. 부속 문서에는 실천 및 검증 방안도 구체적으로 적시해 놨다. 제14조(남북군사분과위원회 구성)도 시급한 현안이다. 이런 것들이 단 하나도 지켜지지 않은 상황에서 “종전 선언을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반문이 나오는 게 당연하다.

 노무현 정부와 부시 행정부는 이런 상황에서 속도를 내면 안 된다. 자칫하면 차기 대선을 위해 한반도 문제를 이용한다는 오해를 받기 십상이다.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은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야 한다. 성급히 ‘선언’만 내놓았다간 또다시 북한에 말려들기 때문이다. 부시 행정부가 북한 핵문제와 관련해 수없이 밝혀온 대로 ‘불가역적(不可逆的)’ 상황을 만들어 가며 평화체제를 진전시켜야 한다. 그래야만 한반도 평화시계를 앞당길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해법은 남북기본합의서에 들어 있다.

이철희 정치부문 부장대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