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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소로스 소로스 펀드 회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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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호 26면

연합뉴스

유럽 사람들은 유럽의 정체성을 정립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나는 그게 쉬운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유럽연합은 ‘열린 사회의 원칙’을 구현하고 있으며 이 원칙은 전 세계를 열린 사회로 이끄는 힘이 될 수 있다.

유럽은 세계를 어떻게 바꾸고 있나

이 말은 설명하자면 이런 뜻이다.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1859~1941)은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1932)에서 ‘열린 사회’라는 개념을 처음 사용했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도덕과 종교의 한 가지 원천은 ‘종족적(種族的)’이며 ‘닫힌 사회’로 귀결된다. 닫힌 사회의 구성원은 서로 친근감을 느끼지만 비구성원에게서는 공포나 적개심을 느낀다. 다른 원천은 보편적이며 ‘열린 사회’에 다다르게 한다. 열린 사회를 이끄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고 증진하는 보편적 인권이다.

칼 포퍼(1902~1994)는 『열린 사회와 그 적들』(1945)에서 베르그송의 구상을 발전시켰다. 열린 사회에 대한 논의의 신기원이 된 이 책에서 포퍼는 열린 사회가 공산주의나 파시즘 같은 추상적이며 보편적인 이데올로기에 의해 위협받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궁극적인 진리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는 공산주의와 파시즘 같은 이데올로기는 거짓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오로지 억압과 강제를 통해서만 사회에 부과될 수 있다. 반면, 열린 사회는 불확실성을 수용한다. 열린 사회는 상이한 의견과 이해관계를 지닌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법과 제도를 수립한다.

유럽연합(EU)은 열린 사회의 원칙들을 괄목할 만하게 구현하고 있다. 유럽연합에는 지도적 원칙들을 집대성한 헌법이 없지만 이 또한 열린 사회의 성격에 걸맞은 것이다. 왜냐하면 포퍼가 주장한 것처럼 인간의 불완전한 지식은 사회적 틀에 대한 항구적으로 유효한 정의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럽연합은 점진적인 사회공학의 과정에 의해 탄생했다. 포퍼는 이런 방법이 열린 사회에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유럽연합의 발전을 주도한 것은 선각적이며 목적의식이 확고한 엘리트였다. 완벽한 것은 없다는 것을 이들은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은 단계별로 차근차근 앞으로 나아갔다. 이들은 제한된 시간에 맞는 제한된 목표를 설정했다. 각 단계가 불충분하다는 것이 미래에 드러나면 또 다른 단계가 필요하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연합은 원래 6개국을 위해 고안된 구조로 27개국을 수용해야 하는 난감한 위치에 있다. 게다가 유럽연합을 계속 발전시켜야 할 정치적인 의지도 퇴색했다. 제1, 2차 세계대전의 기억은 희미해졌고 소련의 위협은 사라졌다. 민족주의, 외국인 혐오와 반(反)이슬람 정서는 점증하고 있으며 이민자 공동체들을 포용하는 데 실패해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다.

불행히도 유럽연합이 겪고 있는 혼란상은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더 광범위한 난맥상의 일부다. 주도적 국가였던 미국은 세계의 어젠다를 설정하곤 했다. 그러나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대(對)테러전쟁 수행을 위해 대통령의 집행권을 확장함으로써 미국 민주주의의 기본적 원칙을 파괴했다. 행정부의 정책에 대한 모든 비판을 비애국적이라고 간주함으로써 부시의 이라크 침공 명령을 허용해 미국에서는 열린 사회의 핵심적인 과정이 붕괴했다.
 
더욱 나쁜 사실은 대테러 전쟁이 역효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무고한 희생자를 양산함으로써 테러 위협을 증가시켰으며 미국의 힘과 영향력은 급락했다. 그 결과 미국은 세계의 어젠다를 설정할 수 없는 형편이 됐다.

유럽연합이 미국을 대신해 세계의 지도자가 될 가능성은 없다. 그러나 유럽연합은 소속 국가들과 전 세계를 향해 모범을 보일 수 있다. 유럽연합 가입을 희망하는 나라들에는 열린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강력한 요구조건이 부과돼왔다. 유럽연합 시민 대부분은 의식하고 있지 못하지만 유럽연합은 고무적인 모범이 될 수 있다. 지금 유럽 사람들에게는 딱 한 가지가 필요하다. 유럽연합이 전 지구적 열린 사회의 원형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그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유럽연합은 공동의 외교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공동 외교정책의 수립과 추진이 가능하도록 제도개혁이 진행되는 동안 이를 핑계로 유럽이 세계 사태를 방관해서는 안 된다. 유럽연합은 이미 세계 무대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막강한 실력을 보유하고 있다.

▶세계 개발 원조의 절반 ▶세계 최대의 단일 시장 ▶ 4만5000명의 외교관 ▶모든 대륙에서 활동하고 있는 10만 명에 가까운 평화유지군 병력 ▶인접국가들이 열린 사회가 되도록 유도할 수 있는 무역, 원조와 유럽연합 가입 심사 등.

유럽이 공동 정책을 수립하면 미국을 포함해 다른 나라들을 설득할 수 있다. 그러나 유럽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데 너무나 자주 실패했다. 예를 들면 유럽은 공동 에너지정책을 수립하는 데 진전을 이룩하지 못해 러시아에 대한 의존이 심화됐고 러시아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교섭력을 구사해왔다.

한편 유럽연합은 헝가리나 폴란드같이 새로 가입한 국가들의 민주주의가 발전하도록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당연히 유럽연합의 공동 외교정책은 반미적이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입장은 실패를 자초하는 것이다. 반미적 공동 외교정책은 부시 행정부가 야기한 국제사회의 분열을 더욱 심각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유럽연합이 국제 협력의 새로운 모범을 보인다면 미국의 차기 정부는 이를 수용하게 될 것이다.

ⓒ Project Syndic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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