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돈 뿌려야 납품 받는 정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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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한국IBM의 임원이 비자금을 조성, 공무원 등에게 수십억원의 뇌물을 뿌리고 입찰을 담합하는 등의 수법으로 6백60억원대의 컴퓨터 납품권을 따낸 것이 드러나 수십명의 관련자가 무더기로 구속 또는 불구속 기소됐다.

개인 차원의 부정이라고는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중 하나인 다국적 기업의 간부가 이런 부도덕한 행위에 연루된 것은 충격적이다. 게다가 LGIBM 등 15개 기업은 입찰 들러리를 서주면서 그 대가로 수십억원을 챙겼다니 우리 사회 납품 과정의 부패고리가 얼마나 뿌리깊은지를 한눈에 보여준다.

그러나 더욱 충격적인 것은 로비를 받은 곳을 보면 국세청.정보통신부.대검.육군본부.해군본부.한전.KT.KBS.새마을금고연합회 등 내로라 하는 정부 및 산하기관이 모두 망라돼 있다는 점이다. 아직도 민간과 접하는 일선에서는 공무원과 관련된 부정부패와 향응.뇌물의 관행이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다는 얘기다.

물론 뇌물은 주는 쪽의 잘못이 크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아직 뇌물 없이는 납품이 어렵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인 데다 이번 경우에서 보듯 공공기관 등 소위 '힘있는 쪽'이 어느 하나 예외가 아닐 정도로 썩어 있는 한국적 풍토에서는 돈 준 쪽만 나무랄 수도 없는 일이다. 왜 한국에 진출한 외국기업들이 "공무원에게 뇌물 안 주면 되는 일이 없다"고 불평하는지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는 투명성 측면에서는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특히 정부 부문의 부패는 민간의 경쟁력까지 잠식하고 있다. 이런 부패의 고리가 단절되지 않고서는 기업은 물론 정부.국가의 경쟁력 강화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시급히 대책이 나와야 한다.

먼저 정부가 바뀌어야 한다. 공무원의 권한을 줄이고, 입찰 과정 등을 투명하게 하면서 감독을 강화해야 한다. 정부가 깨끗해지면 공공기관도 따라오고, 그러면 금융기관과 민간기업의 투명성과 경쟁력 강화도 가능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