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무역공세 속수무책인가(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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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미국정부는 우리 정부와 업계가 추진해온 한국산 반도체에 대해 반덤핑조사 정지협정의 체결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방침을 공식통보해 왔다. 미국측의 추가협상거부는 더이상 한국의 입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겠다는 일방적인 선언으로 보인다. 미국 관계자들은 작년 하반기부터 우리나라의 반도체 생산 및 판매원가에 대한 정밀조사를 했으며,업계도 각종 자료를 성실하게 제공했다. 그런 만큼 반덤핑 마진율의 완화를 기대할만도 했다. 그러나 미국측은 덤핑을 제거하기 위한 한국측의 노력이 충분치 못하다는 이유로 더이상의 협상 자체를 꺼리고 있다.
국제경제 전문가들은 미국측의 강경한 자세로 미뤄 클린턴 행정부의 실체는 자유무역을 내세우면서 실은 적극적인 보호무역으로 가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지적한다.
미국은 한때 일본과 유럽국가들의 자동차 수입에 대한 규제대책을 검토했는데 이들 국가와의 무역분쟁은 우리나라 각 분야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심각한 파장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미국의 대한통상마찰은 최근에 결렬된 쇠고기협상에서도 나타났다. 한미간 영업환경 개선협의와 금년도 최대 현안인 금융정책협의에서도 우리가 신경을 곤두세워 대응해야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지적재산권 보호에 대해서도 미국의 목소리는 예상 수준을 훨씬 넘어서고 있다. 법률시장 등 서비스부문에 대한 개방요구도 더 거세지고 있고 특허공세도 만만치 않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우선 해야할 일은 미 클린턴 행정부의 대외통상정책의 흐름을 정확히 파악하고 우리의 대응기능을 효율적으로 조정하는 것이다. 미 행정부의 각 부처와 의회 및 업계가 산발적으로 대한규제대책을 내놓을 때마다 우왕좌왕해서는 오히려 협상에서 혼란만 가져온다. 특정부처나 특정기업이 각개격파식으로 대미창구에 매달려서는 부작용만 커진다.
미국측의 파상적인 대한규제가 나타날 때까지 정부는 얼마나 협상력을 키워왔느냐에 대한 냉철한 분석과 반성이 필요하다. 정부가 협상력 배양에 대한 반성없이 「통상업무의 일원화」를 내세우며 행정의 할거주의에만 연연해서는 미측의 무차별 공세에 맞서기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청와대비서실은 통상정책의 효율화를 위한 원칙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반도체가 무엇인지,금융시장을 추가 개방하면 국민의 일상생활에 어떤 영향이 오는지도 잘 모르는 사람이 대외통상 창구에 앉아서는 곤란하다. 그러한 사람들은 미국을 잘 알아 지피지기의 전략을 쓸 수 있는 진용으로 교체되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한미간의 산업구조가 결코 경쟁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호보완관계에 있음을 설득시키고 호혜적인 협력관계를 찾아낼 수 있는 수준 높은 교섭단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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