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재 기자의 웰컴 투 풋볼 ⑨ 일어나, 너희가 희망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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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2월, 아랍에미리트에서 20세 이하 세계청소년축구대회가 열렸다. 파라과이와의 예선 2차전, 심한 파울을 당한 한국 수비수가 상대를 가격했다. 주심은 옐로카드를 줬지만 곧바로 레드카드를 꺼내 퇴장시켜도 할 말이 없는 '보복' 상황이었다. 경기 뒤 얼굴이 벌게진 박성화 감독은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한국으로 돌려보내려 했다. 이 선수는 실수했다고 느끼는 순간부터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고 했다. 그는 김진규(전남)였다.

예선 마지막 경기인 미국전. 전반 막판에 주심이 경기를 중단시키더니 한국 선수에게 옐로카드를 꺼냈다. 국제축구연맹(FIFA)에서 금지하고 있는 금속 장신구(반지)가 발각됐기 때문이었다. 반지를 감추기 위해 감았던 테이프가 땀이 나 떨어지는 바람에 반지가 노출된 것이다. 그는 "어머니가 반지를 주시면서 '언제나 끼고 있어라'고 하셔서…"라며 눈을 껌벅거렸다. 이 선수는 김치곤(서울)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김진규는 '욱'하는 성질을 죽이는 법을 배웠고, 김치곤은 더 이상 '마마 보이'가 아니다. 두 선수는 국가대표팀의 주전 수비수로 성장해 아시안컵에 출전했다.

캐나다에서 열린 U-20 월드컵에서 한국은 2무1패로 예선 탈락했다. 폴란드와의 예선 마지막 경기가 1-1로 끝나자 우리 선수들은 그라운드에 쓰러져 일어날 줄 몰랐다. 볼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몬트리올 경기장 인조 잔디를 적셨다.

1997년 말레이시아 U-20 대회에서 한국은 브라질에 3-10으로 대패했다. 외신은 "한국 선수들은 생각이 없는 '로봇 축구'를 한다"고 혹평했다. 10년 뒤, 한국의 신광훈(포항)은 '마르세유 턴'(지단의 주특기 속임동작)으로 브라질 선수를 제쳤고, 신영록(수원)은 부드러운 몸놀림으로 삼바 수비를 농락한 뒤 골을 넣었다. 선수들은 스스로 움직여 공간을 창출했고, 아름답고 창의적인 패스를 주고받으며 적진을 향해 달렸다. 매 경기 선제골을 허용했지만 당황하거나 서두르지 않았다. 차근차근한 패스 플레이로 상대를 조였고, 마침내 골을 만들어냈다. '축구 로봇'은 없었다. "한국 축구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찬사가 쏟아졌다.

이번 청소년대표팀은 골키퍼를 빼고는 주전 대부분이 국내외 프로 소속이다. 브라질.호주 등 유학파도 많다. 4년 전 선배처럼 상대의 거친 플레이에 흥분하지도 않고, 규정을 모르거나 무시하는 아마추어 티도 내지 않았다. 물론 감독의 용병술과 골 결정력 문제는 따로 짚어야 하겠지만.

최근 방한한 프랑스의 골잡이 티에리 앙리는 "청소년 대회는 성적보다 얼마나 많은 선수가 국가대표로 성장했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2007년 한국 축구는 '골든 제너레이션'(황금 세대)을 만났다. 이들이 어떤 모습으로, 얼마나 크게 성장할지 생각만 해도 흐뭇하다. 고개 숙이고 들어온 우리 선수들을 환한 웃음으로 맞아야 할 이유는 이것이다.

정영재 축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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