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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억원 남 주고도 200억원 번 사나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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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형식씨

가난이 뭘까. 한자로 가난할 '빈(貧)'은 나눌 분(分)과 조개 패(貝)를 합친 글자다. 조개, 즉 재물을 나누면 가난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나눠주고 나눠줬는데도 200억원대 주식 부자가 된 사나이가 있다. 전업투자자 표형식(53)씨. 그가 평생 남에게 나눠준 재물은 45억여원에 이른다.

"45억원을 남 줬다고 하면 오해 받을 소지가 있어요. 고아원, 양로원, 장학금으로 기부한 돈은 아마 15억원쯤 될 겁니다. 나머지는 형편 어려운 친구들한테 빌려줬다가 못 받은 돈이에요."

당신이 30여억원을 떼였다면 또다시 누군가에게 돈을 꿔주고 싶겠는가? 다른 사람을 돕고 싶은 마음이 일겠는가?

그는 지금도 이웃을 돕는다. 200억원대 주식에서 나오는 배당금 전부를 매년 꼬박꼬박 기부한다. 지난 3월엔 일성신약 주식 2500주를 자신의 모교인 서울 중동고와 아들의 모교인 연세대, 자활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기부했다.

따로 장학회도 세웠다. 그가 2005년 출연한 기부금으로 운영하는 '참사랑장학회'는 34명의 학생들한테 매년 5000여만원을 전달하고 있다

그는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소액주주들과 함께 한국천사운동중앙본부와 제휴해 소외계층의 자립자활을 돕기 위한 활동에 나설 계획이다.

지난달 중순, 그는 일성신약 주총에서 만난 소액주주들과 함께 1억7500만원을 모아 초, 중, 고교 3곳의 학교발전기금으로 1억5000만원을, 나머지는 천사운동본부에 전했다.

이미 언론보도를 통해 '슈퍼개미', '주주운동하는 개인투자자'로 잘 알려진 그다. 그런데도 그의 선행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가 기자들한테 자신의 삶보다는 소액주주 운동에 대해서만 말하려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번 인터뷰에서도 그는 한사코 자신의 선행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알리려고 한 일이 아니다, 오랫동안 조금씩 한 일인데 합쳐놓으니 너무 많아 보여서 오해를 일으킬 것 같다"고 했다.

여러 번의 전화 통화와 대면, 이메일 요청 끝에, 그가 자신이 '나누고도 부자가 된 사연'을 들려줬다. '슈퍼개미'가 아니라 '인간 표형식'의 삶을.

◇중소기업 임원에서 노점상인으로

1955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사반나패션에서 총괄 담당 임원을 지내기까지 40여년은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때도 기부하고 봉사하긴 했지만 나머지 일상에서 그는 한 여자의 남편이자 1남1녀의 아버지,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어느 날 문득, 그는 더 많은 돈을 벌고 싶다는 욕망을 느꼈다. 그가 회사를 그만 두고 전업투자자로 변신한 것은 1994년. 그로부터 2년 남짓, '꽤 쏠쏠하게' 돈을 벌었다.

돈을 벌자 다가오는 이들이 많아졌다. 친구나 선후배들이 돈이 필요하다며 손을 내밀었다. 어려운 처지의 지인들을 두고 볼 수만 없었던 그는 후하게 돈과 주식을 꿔줬다.

1997년 외환위기, 화수분 같던 증시가 반토막이 났다. 그가 돈을 빌려줬던 친구, 선후배들과는 연락이 끊겼다.

그해 어느 날, 그리 친분이 깊지 않았던 사회 선배가 그를 찾아와 돈을 꿔달라고 했다. 그때 그가 가진 돈은 전부 합해 300여만원. 마지막생활비였다. 거짓말하기는 싫었다. 그래서 솔직히 고백했다. 이 돈이 전부라고.

"'그 돈이라도 빌려달라'고 하더군요. 난감했죠. 그런데 오죽하면 별로 친하지도 않은 나를 찾아왔을까 싶더라고요. 내게는 그저 돈이지만 이 선배에게는 어쩌면 '목숨'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전부와 다름 없던 300만원을 꿔줬다. 결과는? 1주일 후에 갚겠다고 약속했던 그 선배는 연락 없이 사라졌다. 주식 부자였던 그는 거리로 나가 "모자 2개에 5000원"을 외치며 노점상 일을 시작했다.

◇"주여,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1998년 하반기, 그는 노점상 해서 모은 돈과 지인들이 일부 갚은 돈을 종잣돈 삼아 주식시장으로 돌아왔다. 주식시장에선 종잣돈이라고 말하기에도 어려운 '푼돈'이었다. 어려운 때였다. 그래도 가족은 그를 믿어줬다.

어느 날 새벽, 그는 절실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제발 한 번만 기회를 더 달라고. 그러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겠노라고. 어려운 이웃을 한 번 더 돌아보고 그들과 더불어 살도록 하겠노라고.

얼마 후,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한 고등학교 선배가 찿아 와 그에게 주식 투자를 해달라며 억대의 돈을 맡긴 것이다. 그것도 증빙서류 한 장 없이.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 선배와 그는 일면식도 없었다.

이때부터 그의 종목 예측은 '족집게처럼 딱딱' 맞아 떨어졌다. 그 자신도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2000년까지 이어진 증시 활황 속에 그는 전업투자자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하나님이 남을 도우라고 한 번 더 기회를 주신 것이 틀림없어요. 제 삶을 돌아보면 나눌수록 더 늘어난다는 성경 말씀이 실감이 나요. 내게 주어진 재물을 남에게 조건없이 나눠줄 때 하늘은 더 큰 것을 선사합니다."

인터뷰 동안, 그는 전도서 11장 1절을 여러번 인용했다. "너는 네 식물(食物ㆍ음식)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Cast your bread upon the waters, for after many days you will find it again.)"

"저를 보고 사람들이 성공한 주식투자자라고 하지만, 그건 제 능력이 아닐 겁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제게 돈을 벌 기회를 안겨준 덕분입니다. 돈을 펑펑 쓰고 호의호식하며 살라는 게 아니라 좋은 일에 가치있게 쓰라는 뜻이지요."

◇하늘이 뜻한 바를 돈으로 이루는 청지기

하지만 그 역시 안다. 세상에 돈 필요한 곳은 많고 돈을 주는 사람은 적다는 것을. 그는 "종잣돈 깨서 탈탈 털어넣는 식의 기부는 오래가지 못한다"고 경계한다. 결국은 돈을 잘 벌어야 좋은 일도 오래할 수 있단다.

이제 그는 더 많은 협력자들을 이끌어내 더 효율적으로 '일'을 벌이고 싶다고 말한다. 그가 계획하고 있는 '일'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장학사업, 마이크로크레디트사업을 통해 좀 더 체계적으로 우리 사회에 '기회'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표씨와 일성신약 주주협의외가 낸 신문광고들.

또 하나는 소액주주의 권리를 높이는 일이다. 일성신약 소액주주들과 그는 9월에 '행복한 주주포럼' 발족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성공투자로 이웃과 더불어 행복하게 잘 살자'라는 나눔의 철학을 주주포럼 이름으로 실천하고 싶다고 말한다.

200억원대 주식부자이지만, 그는 그 흔한 자가용 한 대 없다. 부동산도 일산 후곡마을의 57평 아파트 한 채뿐이다. 어디 갈 땐 걷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그는 "국민학교 때 '토지는 생산 수단, 주택은 주거 수단'이라고 배웠다"며 "배운 대로 살 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배운 대로'라기 보다는 믿는 대로 사는 사람으로 보였다. 그는 "사람은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이시니라"라는 잠언 16장 9절을 빌어 말한다.

"저는 그저 하늘이 뜻한 바를 돈으로 이루기 위한 '청지기(관리인)'가 아닌가 싶습니다. 죽게 되면 어차피 빈 손으로 떠날 것, 이왕이면 특별한 인연으로 내 곁의 이웃과 삶을 나누고 싶네요."

[머니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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