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자 몰락 대비 망명자금 가능성/북 외교관 2백만불 밀반출 기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서방은행에 거액외화 예치 비자금 조성”/돈출처·무모한 반출이유는 여전히 의문
북한 대외무역은행 과장으로 이 은행 파리사무소 부대표로 있는 오광철씨가 프랑스 세관 당국에 체포된 것은 지난해 10월 중순으로 당시 그는 여행객을 가장,파리에서 오스트리아 수도 빈으로 가는 여객기의 탑승수속을 밟던 중이었다.
X­레이 투시대를 통과하던 그의 여행용 가방에서 발견된 수많은 벽돌모양의 직육면체를 수상히 여긴 세관직원은 그에게 가방을 열 것을 요구했고 그 안에서 나온 것은 엄청난 액수의 미화 현금이었다. 1백달러짜리 1백장 묶음으로 모두 2백29개가 여러개의 비단보자기에 싸여있었던 것.
5만프랑(약1만달러) 이상의 현금을 반출할 경우 세관에 사전신고토록 돼있는 외환관리 규정에 따라 프랑스 세관 및 경찰당국은 그를 체포하는 한편 자금의 출처와 밀반출 기도경위 등에 대한 조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오씨는 밀반출을 기도하기 얼마전 프랑스 대리인을 통해 프랑스내 여러 은행과 접촉,약4백만달러의 외화 현금을 예치하는 조건으로 당좌계좌 개설이 가능한지를 문의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계좌명의는 어느 레바논계 프랑스인을 내세웠다. 그러나 프랑스 은행들은 거액의 현찰이라는 점에 유의,모두 계좌개설을 거절했는데 마약이나 무기거래 등과 관련된 「검은 돈 세탁」목적일 가능성을 경계했기 때문이었다는 후문이다.
최근 프랑스정부는 출처가 불명확한 돈에 대한 은행측의 조회의무를 대폭 강화한바 있다. 자금출처에 대해 오씨는 외교행랑 편으로 본국으로부터 받은 돈이라고 대답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미 프랑스의 여러 은행들로부터 빚독촉에 시달리고 있는 북한이 비록 가명계좌이긴 하나 위험부담을 무릅쓰고 프랑스은행에 계좌개설을 시도했던 이유에 큰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 점에 대해 프랑스 관계당국은 자신들이 관심을 가질 문제가 아니라는 입장이나 프랑스 은행 관계자 등의 말을 종합해 볼때 검은 돈을 세탁하는 한편 특정인을 위한 정상적 결제계좌를 만드는 두가지 목적을 위해서였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아프리카·중동지역 권력자들이 프랑스은행에 현금으로 가명계좌를 개설,부동산 등에 투자토록 함으로써 유사시에 대비하는 것은 과거 흔히 있어온 관행이라는 것.
이와 관련,이번 사건은 김일성·김정일 부자가 유사시에 대비,서구은행에 거액의 외화를 예치하고 있다는 일부 보도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되고 있다. 최근 한 북­러시아 합작회사의 러시아측 고위간부는 『북한은 양국 합작회사를 통해 유럽은행에 막대한 외화를 극비리에 예치하고 있으며 이 비자금은 김일성·김정일 부자가 정권몰락에 대비,해외 망명생활 및 조국 해방투쟁 자금으로 사용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증언한바 있다.
그러나 북한이 프랑스은행에 예치하려 했던 막대한 현금의 출처,프랑스 반입경로,외교행랑 등을 이용할 수 있는데도 거액의 현찰을 무모하게 직접 반출하려 했던 이유 등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다.
아무튼 이번 사건은 최근의 북한정세를 파악하는 중요한 열쇠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 관계전문가들의 지적이다.<파리=배명복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