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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광복 62년 사라지는 것들

중앙일보

입력

월간중앙시대의 물결에 휩쓸려가는 것들이 많다. 현대인들이 간직한 저마다 추억의 박물관에서 가장 흔하게 만나는 흑백필름은 어떤 것일까? <월간중앙>이 광복 이후 우리 곁에서 사라져가는 것들의 ‘뒷모습’을 취재했다.


그 시절, 도시의 아침 출근길 풍경부터 떠오른다. 콩나물 시루 같은 만원 버스에서 누구도 아랑곳하지 않고 펑퍼짐한 엉덩이로 승객들을 밀어올리며 “오라잇”을 외치던 그 열정의 시내버스 안내양들 말이다.

추운 겨울밤 하숙방에서 책장을 넘기다 보면 바람소리에 들릴락 말락 실려오는 “메밀 무~욱, 찹쌀떠~억 사려” 하던 떡장수의 구성진 목소리. 겨울이 오는 길목에서 동네 골목길에서 자주 마주치던 연탄집 아저씨의 숯검뎅이 웃는 얼굴도 자꾸 생각나는 장면이다.

시골 촌뜨기들은 추억의 도수가 훨씬 센 편이다. 머리에 버짐 딱지가 달라붙은 까까머리 아이들이 특히 벌벌 떨었던 동네 이발관. 날 선 수세미로 머리를 박박 문질러 대면 눈물이 찔끔 났던 그 기억을 잊을 수 없다. 팔걸이 위에 널빤지를 깔고 앉아 싹둑싹둑 머리 잘려나가는 소리를 듣다 보면 어느 새 꿈결이다.

쌀 한 줌이든, 술지게미 한 되든 배고픔을 쉽게 해결할 수 있었던 시골 촌뜨기들의 놀이터였던 방앗간과 양조장, 엿가위질 소리만으로 섬돌 위의 고무신이든 고철이든 아이들의 눈을 희번덕거리게 했던 엿장수 할아버지와 뻥튀기 아저씨도 기억 속에 가물거린다.

그뿐이랴? 대장간·전당포·함진아비·프로레슬링·성냥공장·양장점·서커스단·뻥튀기·음악다방·니나놋집이 그렇고, 시골 5일장·염전·원두막, 우물가·빨래터·학교종… 그리고 또 다른 식솔인 머릿니의 고통 또한 마찬가지다.

물질적으로 넉넉한 도시인이라도 곧잘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쉽게 하는 요즘 세태는 어쩌면 가난했지만 넉넉하고, 서로 나누면서 살았던 그 시절이 그리워서일 게다.

인생 황혼이 가까워질수록 마음속에서 하나둘씩 사라지는 것들을 바라만 보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대목이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한때의 사랑, 한때의 청춘, 그 아쉬운 이름들은…’ 자꾸만 희미해져만 간다.
살아갈수록 어르신들이 떠난 빈자리가 더 커보이는 것도 그러한 후회 때문이리라. 추억 속에 또렷이 살아있는 그 시절의 장면들을 만나러 가보자.

▶경북 의성에 남아있는 전국 유일의 성냥공장인 '성광성냥' 손진국 사장이 알성냥을 곽입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1 성냥공장
경북 의성 마지막 회사 ‘성광성냥’
“불장난하면 밤에 오줌 싼데이~”

“이거, 통성냥 한 통에 얼마 하는지 압니꺼? 부가세 더해 겨우 550원입니다. 쳇, 요새 요구르트 한 병 값이 얼마인데…. 그 많던 성냥공장 문 닫은 것이 다 그 때문인기라. 내가 끝까지 성냥 만드는 게 ‘좋은 시절 오지 않겠나’ 싶어 하는 거 절대 아니오. 정부가 이런 것은 보존한다는 의미에서라도 도와줘야 하는데….”

경북 의성에서 여태까지(?) 성냥공장을 하고 있는 손진국(70) 씨. 국내에 남은 마지막 성냥공장으로 알려진 ‘성광성냥’을 이끌어온 그는 이제는 취재 요청도 달갑지 않은 표정이다.

“마지막 남은 성냥공장이라고 해서, 방송국들에서도 오겠다는 걸 다 물리치지. 그거 나온다고 공장에 도움되는 것도 아니고, 이제는 다 귀찮아.”

처음 수소문할 때만 해도 성냥공장이 몇 개쯤은 더 남았을 줄 알았다. 그런데 오로지 이곳뿐이란다. 몇 해 전까지 남아있던 공장 두 곳도 결국 못 버티고 문을 닫았다. 일부는 중국으로 떠나고, 알성냥을 수입해 곽입(槨入)하는 공장이 경남 진영에 하나 남아있을 뿐.

1962년에 설립됐다는 성냥협동조합은 1984년 이미 간판을 내렸고, 노동부가 내는 <한국직업사전>에서도 ‘성냥갑 제조원’이라는 직업이 삭제된 지 오래란다.

유엔 팔각성냥, 기린표 통성냥, 비사표 갑성냥, 제비표 성냥…. 그 옛날 부뚜막 위에, 혹은 석유풍로 밑에, 호롱불 아래 정겹게 놓여 있던 그 성냥갑들. 전기가 귀하던 시절 혹시 물에라도 젖을까 신주단지 모시듯 했던 그 성냥을 구경하기가 여간해서는 어려운 시절이다.

“나라 발전하니까 이게 아닌기라”

손씨 회사가 만들어낸 상표는 ‘향로성냥’과 ‘덕용성냥’. 경상도 지역과 동해안 일대에서는 특히 알아주던 성냥이었다. 그러나 50년 넘는 긴 세월을 성냥공장과 함께해온 손씨의 속내는 더 복잡해진 것 같다.

“계속 적자요. 이제 종업원이라고는 11명밖에 안 남았는데, 뭐가 신이 나겠어? 종업원들이라고 했댔자 오륙십 된 동네 노인들이 다거든.”

전쟁통에 피란갔다 왔다 1954년 열여덟 나이에 들어온 것이 이 성냥공장이었다. 성광성냥은 본래 이북에서 피란 내려온 사람들이 세웠다. 손씨는 처음 종업원으로 들어와 일하다 주주로 참여했고, 나중에는 아예 공장을 인수했다.

“나라가 발전하니까 이제 성냥은 아닌기라. 자동으로 점화되는 가스 레인지가 나오고, 쇠죽 끓여 먹이다 생육을 하고, 불 때는 아궁이에 보일러 들이고… 생활이 이리 바뀌었으니…. 그래도 배운 게 성냥 만드는 기술뿐이니 어떡해.”

성냥공장이 한국에 처음 생긴 것은 1880년대라지만, 일인들이 1917년 인천 금곡동에 세운 ‘조선인촌(朝鮮燐寸)’이 성냥을 대량생산하면서 일반에도 알려졌다. 인천에 성냥공장이 처음 들어선 것은 압록강 쪽에서 목재 조달이 원활했기 때문이다.

조선인촌도 신의주에 제재공장이 있었다. ‘인천의 성냥공장’이라는 명성은 6·25를 전후해 인천의 금곡·송림·화수동 일대 주택가에 성냥공장이 즐비했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성냥의 ‘전성기’를 꼽으라면 아무래도 1970년대 전후다. 전국적으로 300개가 넘는 성냥공장이 성업하던 시절이다. 성광성냥도 그때는 한 달 매출이 무려 6,000만 환을 넘던 호기도 누렸다. 지금 돈 가치로 바꿔 말하면 6억 원이라는 거액에 해당한다.

“한국에 남은 마지막 성냥 제조기야”

“우리 성광성냥이 부산 영덕에서 강원도 고성까지 두루 잘 팔렸지. 바다 가까이에서는 염분이나 습기 때문에 성냥이 금방 눅눅해지는데, 두약 알맹이가 까만 우리 성광성냥은 그럴 일이 없었거든. 그 시절 도매상들이 제때 성냥을 공급받으려고 나한테 로비를 하던 때도 있었어.”

특히 뱃사람들에게 ‘향로성냥’의 인기는 대단했다. 잘 켜지고, 잘 안 꺼지기 때문이었다.

“집집이 성냥이 필수품이던 시절 이야기지만, 공장 직원들이 200명이 다 됐지. 그때 공장에 젊은 아가씨가 바글바글했는데, 주문 밀리면 그것도 모자라 이 집 저 집에 성냥갑 붙이는 일감을 나눠 줘야 했다니까.”

그래서 오십 넘은 의성 사람치고 성광성냥 돈 안 만져본 사람 없다는 말이 나왔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성냥 소비가 급격히 줄고, 1회용 라이터가 등장하고, 값싼 중국산 성냥까지 들어오면서 사정은 확 바뀌었다.

“옛날에는 축렬기에 성냥개비를 꽂고 손으로 일일이 약을 묻혔어. 그러다 윤전기와 축렬기가 반자동화하면서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는데, 바로 사양길로 간 거야.”

아닌게아니라 손 사장은 1980년쯤 한 대에 8,000만 원이나 하던 윤전기(반자동 성냥 제조기)를 두 대씩이나 들였다. 그는 “그때 과잉생산되면서 전국 성냥공장이 덤핑 경쟁을 벌여 스스로 제 무덤을 팠다”고 회고한다.

뜻밖에 성냥공장의 생산라인은 엄청나게 크고 복잡한 규모다. 슬레이트와 양철 지붕을 얹은 낡은 건물 동마다 미각기·왕발기·성냥제조기·축렬기·건조기 같은 커다란 기계가 들어차 있다.

“그나마 지난해 7월 1,000t짜리 윤전기를 방글라데시에 팔았어. 문 닫으면 다 고철 값이니 말도 안 되는 값에 넘겼지. 아마 이 윤전기와 축렬기가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기계일 거야.”

가끔 절집이나 일부 잡화상이 통성냥을 주문해 오지만, 생산량의 대부분은 광고업자의 주문량에 의존한다. 한 달 매출이 2,000만 원이면 그래도 잘한 축이란다. 접객업소를 대상으로 한 광고성냥과 케이크 성냥이고, 그나마 주문이 그치면 1주일씩 기계를 세우고 사람을 놀릴 때가 많다.

손씨는 과거를 떠올리며 “업자들끼리 하는 이야기였지만 그 시절에는 정전이 자주 됐는데, 서울 시내에 정전이 한 번 되면 갑성냥 3만 갑이 팔린다는 말이 있었지”라며 껄껄 웃었다.

요즘에는 가끔 초등학생들이 성냥공장에 견학을 오기도 한다. 그때마다 손씨는 신이 나서 아이들 앞에서 성냥 이야기를 풀어놓는단다. 주머니에서 ‘포켓용 성냥’(단가 23원짜리)을 꺼내 담뱃불을 붙여 문 그는 “성냥 하는 사람이 라이터 쓰겄어?”라며 맥없이 웃었다.

▶충북 진천의 덕산양조장 발효실. 나이 일흔이 넘은 오래된 술독 안에서 술은 열사나흘을 충분히 익는다. 작은 사진은 전통 양조장을 이끌어 온 이규행·송향주 부부

2 양조장
전통 술 고집 충북 진천 덕산양조장
아버지 술심부름하다 됫병 막걸리도 홀짝

물 좋고 땅이 좋아 고속도로에서 이정표를 만나자마자 ‘생거진천(生居鎭川)’이라는 말이 입안을 맴돈다. 충북 진천군 덕산면 용몽리. 그곳에 가면 아직 그 시절의 시골 양조장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진천 덕산양조장. 1929년 일제 강점기 때 생겨난 술도가인데, 수십 개의 술독 하며 목조식 양조장 건물이 옛날 그대로다. 검은색 옻칠을 둘러쓴 양조장 건물은 당시 백두산에서 전나무·삼나무를 베어내 압록강에서 제재해와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은 문화재청이 지정한 근대건축등록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다.

단층 합각 함석을 얹은 지붕 아래에는 ‘소화 5년 경오구월 초이일 미시…’라는 상량문이 눈에 띈다. 술 익는 냄새가 후끈후끈한 양조장 안에는 발효실과 종국실로 통하는 나지막한 문과 작은 창틀, 높은 천장이 인상적이다.

종국실과 발효실 벽면에 피어오른 흑국(黑麴)과 백국균이 이 양조장의 오랜 역사를 설명해 준다. 발효실의 입을 벌린 술항아리에는 ‘1935년 용몽제(龍夢製)’라는 글씨가 또렷하다.

6·25 동안 양조장이 국방군 진지로 쓰이기도 했는데, 퇴각하는 군인들이 양조장을 소각하려 하자 주인이 그때 돈 45원과 장작 두 트럭, 소 한 마리를 주고 그들을 설득했다고 한다.

건물도 건물이지만, 양조장에서 빚어낸 술맛도 족히 ‘문화재급’이다. 요즘 시중에서 팔리는 약주라는 것이 대부분 밀가루나 옥수수 전분에 물을 넣어 끓이고, 나중에 아밀라아제를 첨가한 당화주(糖化酒)이지만, 이곳 양조장 주인은 고집스레 십 수일 걸려 전통 방식의 발효주를 빚고 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이장범)와 아버지(이재철·77)에 이어 3대째 덕산양조장을 지키는 이규행(47) 씨가 그 주인공.

지금은 ‘세왕주조’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덕산양조장은 1970년대 약주 제조업체 통폐합시절 오히려 득을 봤다. 충북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양조장으로 한때 하루 1만2,000병의 약술이 팔려나가 ‘양조장 하면 부잣집’이라는 등식을 증명했다.

하지만 약술과 막걸리는 1980, 90년대 들어 맥주와 희석식 소주에 자리를 내주면서 시들해졌고, 양조장들도 설 자리가 좁아져 사라져갔다.

“예전에 ‘대한뉴스’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농번기에 모심기나 벼베기하는 모습 많이 보셨죠? 대통령이 충청도에 내려오면 꼭 경호원을 시켜 우리 양조장에서 금방 내린 술을 가져오게 했답니다.”

“배고픈 시절 술지게미로 배 채우고…”

덕산약주·덕산막걸리를 즐겼던 이가 어찌 박 대통령뿐이랴? 서민의 술인 막걸리는 특히 이곳 진천에서 대를 이어 땅을 일군 농부들에게는 가장 가까운 일벗이었을 터다.

부엌의 부지깽이도 일어선다는 모내기 날 막걸리는 새참거리에 불과하지만 모꾼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먹을거리였다. 배고픈 시절 ‘부잣집’ 양조장에서 술지게미 한 됫박 얻어먹어 보지 않았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다.

덕산약주와 덕산막걸리를 들이켜본 이들은 지금도 “옛날 바로 그 맛”이라면서 무릎을 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직접 양조장에서 백국균을 띄우고, 십 수일 술을 담그고, 술 빚는 것이 모두 옛 방식을 고수하는 탓이다.

150m 지하 암반수와 진천산 백미를 80% 사용하는데, 그것도 모두 햅쌀이다. 그래서인지 덕산약주는 순하고 부드러우며 입안의 향이 오래가고 술을 마신 뒤에도 머리가 아프지 않다고 한다.

“술맛은 술 만드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래서 양조장에서는 나갈 사람이 빚은 술은 빨리 쉰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씨 부부의 마음 씀씀이도 요즘 사람들 같지 않다. “평소 마음을 비우고 술을 빚는다”는 그들은 “물의 결정체도 술을 빚는 이의 마음에 따라 달라진다”고 믿는다.

우리 술 개발에 몰두해온 이씨는 2000년 진천군이 지정한 신지식인 제1호다. 그런 그가 올해 진천 특산인 흑미(黑米)를 이용해 검정쌀막걸리와 검정쌀와인(상표명 ‘몽그랑’)을 세계 최초로 개발해 출시했다. 이씨는 “심혈관계질환에 좋다는 레드와인 속의 안토시아닌 성분이 검정쌀와인에는 5배나 들어있다”고 자랑했다.

▶고향에서 30년 넘게 이발소를 운영해온 이수신 씨가 동네 아이의 머리를 손질하고 있다. 그는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의 머리 손질을 위해 이웃 마을까지 ‘출장 서비스’를 나가기도 한다.

3 시골이발관
전남 장흥 수문이발관
“미장원 땜시 손님 많이 떨어져부럿제”

낯선 시골길을 달리다 보면 문득 낯익은 광경을 만나고는 한다. 그때마다 자연스럽게 차를 세우고 싶은 충동이 인다.

장흥 안양면 수문리에서 보성 율포 해변을 끼고 도는 18번 국도를 가다 만나는 수문이발관을 대했을 때도 그랬다. 동네 사랑방 구실을 했던 고향 마을의 그 이발관이 문득 생각난 탓이다. 개펄 해수욕장과 키조개로 유명한 안양 수문리에는 20년 전만 해도 번듯한 이발관이 둘씩이나 있었다.

1935년에 지어 나중에 슬레이트 지붕을 올렸다는 이발관 건물도 마치 골동품 같다. 예닐곱 평 남짓 되는 이발소 안에는 14인치 컬러TV가 있고, 면도기와 ‘바리깡’ 등 이발기구를 소독하는 약장, 면도칼을 가는 마술 같은 피대(皮帶)와 머리카락을 세우는 철제 고데도 거울 옆에 걸려 있다. 기도하는 소녀를 그린 ‘키치그림’, 면도 거품 데운 자국의 연탄난로 연통도 옛날 그대로다.

“요즘에는 아이들도 99%는 미장원에서 머리를 잘라뿐께 손님이 없어. 내 나이 또래나 어르신들이 하루 서너 명 될랑가 몰르것네. 이 걸로는 생활이 안 되제.”

수문이발관 주인 이수신(56) 씨는 첫마디부터 앓는 소리다. 손에 가위를 쥔 지 벌써 44년. 평생 같이해온 이발 기술이 이제는 전생의 업보처럼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는 투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다른 거 할 만한 게 뭐라도 있어야제. 거동 못하는 동네 노인들 공짜로 머리 깎아드리고, 내가 이 일 안 한다믄 누가 하것능가?”

1950∼60년대 부산에서 살다 폐결핵을 얻어 고향으로 내려온 부친이 무허가 이발사 노릇을 해서 이씨는 어깨너머로 이발 기술을 배울 수 있었다. 다섯 살 때부터 관절염으로 다리를 절었던 그는 몸이 아파 열네 살이 돼서야 초등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1971년에는 부산에서 장애인들이 다니는 한독직업훈련소에 들어가 정식 이용면허증도 땄다. 그가 고향인 이곳 수문리에 현대이발소라는 간판을 내건 것은 1976년 10월의 일이었다.

“아버님이 이전에 동네에서 집집이 봄에 보리 서 되, 가을 타작 때 쌀 두 되씩 ‘나가시’를 받고 머리를 잘라 줬지라. 이녁 목구녕 채우기도 어려웠는데 나중에 결국 빚만 지고 돌아가셨어라. ‘사이발’ 한다고 주변에서 신고가 들어간 것도 여러 번이었거든. 지서에 불려가 기계 빼앗기고 벌금도 많이 물었지만, 붙어 있는 게 목숨인디 어쩔 수 있당가? 부잣집에 일꾼들이 들새경 날새경 받고 살던 시절 이야기여.”

수문리가 한창 흥하던 시절에는 이발소도 꽤 복작댔을 것이다. 동네가 200가구나 되는 데다 1975년부터인가 키조개가 갑자기 해류를 타고 동네 앞바다로 쓸려와 큰 호황을 이뤘다.

“제주도와 삼천포 같은 데서도 해녀들이 몰려와 한 150명은 됐을 거여. 자연산 키조개를 갈쿠리로 긁던 시절인디, 집집이 해녀들이 민박을 했응게로 시절이 좋았제. 그때 수문이 장흥읍보다 사람이 더 많았당께.”

“인자 어르신들 머리 잘라드리는 게 낙이제”

명절만 다가오면 하루에 서른댓 명씩 머리를 잘라야 할 정도로 바빴던 시절이었다. 수돗물이 없던 때여서 강가에서 지게로 물동이를 져 날라야 했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 이발소는 눈에 띄게 한산해졌다.

동네에 사람도 없었지만 미장원이 여기저기 늘어난 탓이었다. 수문리의 현대이발관과 수문이발관도 결국 1995년께 통폐합으로 생존을 모색했다 하나가 문을 닫았다.

그래서 안양면에 남은 이발관이라고는 고작 두 개뿐이다. 장흥군이용사협회도 20년 전에는 정회원이 60명이나 됐지만 요즘은 35명뿐이다.

“요새는 미장원 땜시 손님 다 떨어져부럿제. 젊은 사람들이고 아이들이고 다 그쪽으로 가불잖여.”

이씨는 그래서 늘 부인에게 빚을 진 기분이란다. 보험설계사다, 화장품 판매다, 바다 인부일이다 안 해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대학 나온 아들들이 보란 듯 공무원시험에 합격할 날이 더욱 기다려진다.

▶시정수 씨가 운영하는 금성정미소는 끝없이 펼쳐진 김제평야 언저리에 자리 잡고 있다. 시씨가 정미기를 거친 백미를 살펴보고 있다.

4 정미소
전북 김제 금성정미소
“쌀금 올라야 정미소도 먹고살지”

처음에는 ‘시콩시콩’ 하다 이내 ‘텅 텅 텅 텅…’ 소리를 내며 적막한 시골 동네를 뒤흔들던 우람한 방앗간 발동기 소리를 기억하시는지? 그것을 농촌의 고동소리라고 말해야 할까? 연자방아나 물레방아가 있던 자리에 개발시대에 들어선 기계식 방앗간 이야기다.

1970년대, 보릿고개의 설움을 단박에 해결한 통일벼가 나온 뒤 방앗간 발동기 소리는 더 커졌다. 전국 어디를 가도 밤낮으로 들을 수 있는 고향의 소리가 돼버린 셈이었다.

가을걷이 때는 나락을 찧지만, 한때는 밀을 갈아 밀가루를 만들고, 설날에는 가래떡이 그 방앗간의 신통방통한 기계들에서 뽑혀 나온다. 고춧가루를 빻고, 기름을 짜고…, 추수 때나 명절 때 그렇게 부산하다가도 한겨울에 발동기 소리가 멈추면 농촌 마을도 긴 잠에 빠졌다.

서쪽으로 만경·김제평야를 안고 섰는 김제시 금구면에도 그런 추억의 방앗간이 하나 남아있다. 금성정미소라는 이름의 이 방앗간은 늦봄인 데도 여태 쌀을 찧겠다는 이들이 찾아들어 “과연 김제”라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방앗간을 찬찬히 뜯어보면 사정이 그리 녹록하지 않아 보인다.

정미소 주인 시정수(60) 씨.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홀로 공룡 같은 기계들과 씨름하고 있었다.

“도정비에서 용달비 빼면 남는 게 있어야지!”

시씨가 정미소를 처음 시작한 것은 1980년. 1967년 월남에 갔다가 다시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오랫동안 정비사 일로 돈을 벌어 고향에 정미소를 산 것이 그때였다. 당시 정미소를 사는 데 80kg짜리 쌀 700가마 값을 치렀다고 한다. 정미소 하나만 있으면 먹을 걱정 없고, 일꾼들도 한 달에 쌀 두 가마만 주면 쉬 구하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하루 80㎏짜리 쌀 100가마를 너끈히 찧던 시절인데, 일꾼도 네댓 명씩 두고 일했어. 그런데 지금은 하루 일당이 쌀 한 가마 값이고, 일이 힘들어 나서는 사람도 없거든. 옛날에는 일할 맛이 제대로 났는데, 지금은 맥만 풀려. 쌀 찧어 밥 먹고 사는 정도지, 뭐.”

금성정미소처럼 시골 마을 방앗간들은 1980년대 들어 농협이 주도하는 대형 정미공장들에 하나 둘 떼밀려 지금은 떡 찌고, 고추 빻고, 기름 짜는 읍내 방앗간 말고는 구경조차 어려운 처지다.

금성방앗간은 안팎으로 허름한 모습이지만, 전기 스위치를 올리자 공중에 매달린 구동바퀴와 피대(벨트)가 돌아가면서 정미기계가 툴툴거리며 잘도 움직인다.

벼를 입구에 쏟아부으면 나무 승강기를 타고 현미기로 옮겨 탄다. 껍질을 벗은 현미는 왕겨 풍구에서 왕겨와 분리된다. 현미 분리기에서 현미와 덜 까진 벼를 다시 솎아내고, 청미 선별기에서는 모자란 벼와 여문 쌀이 분리된다.

정미기에서 3단계 과정을 거쳐 백미가 만들어지는데, 여기서 7∼10분도 쌀을 결정해 준다. 정미기를 빠져나온 백미는 마지막으로 석발기로 옮겨져 싸라기와 돌을 분리하지만, 요즘에는 질 좋은 쌀을 만들 요량으로 연미기에서 쌀을 다시 깎고 닦는 작업이 추가된단다.

이렇게 해서 방앗간이 받는 도정비는 얼마나 될까?

“쌀 40kg짜리 한 가마에 도정비로 겨우 2kg을 받거든. 곡주들이 늙은 나이에 왜 혼자 그 고생 하느냐고 하지만, 뭘 몰라서 하는 소리야. 쌀금 안 오르면 정미소는 정말 얻어먹을 것이 없는데, 지난 5년 새 쌀금이 하나도 안 올랐거든. 인건비는 거꾸로 6배나 올랐는데, 그깟 도정비로 기사 한 사람이나 쓸 수 있겠어? 도정비 절반은 또 벼 실어나르는 용달 기사한테 쪼개줘야 하잖아.”

체중이 겨우 45kg밖에 안 되는 시씨이지만 40kg짜리 쌀가마니를 불쑥 어깨에 들쳐멜 정도로 힘이 넘쳤다.

“옛날에는 방앗간 하면 부잣집 소리를 들었지만 지금은 천한 사람 취급당해. 방앗간 해서 폐병 안 가진 사람이 드물고, 젊은 사람이 하겠다고 나서지도 않아요. 더구나 집집이 자가 도정기가 많이 보급된 마당에 정미량은 점점 줄어들거든. 이렇게 계속 방앗간이 문을 닫는 추세라면 대형 정미소 말고는 살아남지 못할 거야.”

널따란 김제평야 언저리의 방앗간들도 속절없이 문을 닫는 중이다. 금구면에만 한때 열댓 개나 됐던 정미소는, 반절도 채 남지 않았다. 문 닫은 정미소 기계들은 고철로 헐값에 팔려나간다. 시씨는 “정미소 해서 큰돈은 못 벌었지만 아들 둘 대학 보낸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한다.

▶서울 수색동에 위치한 형제대장간에서 류상준·상남 형제가 무당집에서 주문한 작두 날을 담금질하며 날을 세우고 있다.

5 대장간
서울 수색 형제대장간
“농기구보다 건설도구 주문이 더 몰려”

일산신도시에서 서울 모래내 쪽으로 버스를 타고 오다 보면 오른쪽으로 대장간이 눈에 띈다. 새로 지은 수색역 주차장과 면한 ‘형제대장간’. 여기 말고도 시내에 대장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형제대장간만큼 많이 알려진 곳은 없다. 류상준(57)·상남(49) 형제가 쉴 새 없이 화덕 옆에서 메질을 하며 비지땀을 쏟는 일터다.

옛날에야 시골 장터나 마을에도 대장간 하나쯤은 있었고, 떠돌이 대장장이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농기구가 기계화되고, 생산이 자동화하면서 대장간은 하나둘씩 문을 닫았다.

“초등학교 졸업하고 열두 살 때부터 쇠를 만졌어요. 아버지가 원래 소 발굽에 다는 편자를 잘 만드셨는데, 옆집 아저씨가 모래내에서 대장장이를 하셨거든. 쇠 두드리는 것이 재미있어서 가르쳐 달라고 했는데, 풀무질부터 시작한 대장장이 일이 벌써 40년이 넘었어요.”

상준 씨에게 대장 일을 가르친 박용신 씨는 몇 해 전 작고했고, 지금 모래내 대장간은 다른 대장장이 차지가 됐다. 형인 상준 씨가 화덕에서 벌겋게 달군 작두를 모루 위에 놓고 메질을 한 뒤, 재차 물속에 처박았다. 이렇게 담금질을 거듭할수록 날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

“박 영감 밑에서 일을 배우고 처음 암사동에 대장간을 차렸는데 장사가 참 잘됐어요. 암사동 주변이 대부분 농사짓는 땅들이었는데 하남 신장·황산에서도 주문이 몰려들었어. 동생뿐 아니라 어머니까지 메질을 하셨는데, 동네 어른들이 노인네 메질 시킨다고 흉 많이 봤지. 어머님께 지금도 늘 죄송하죠.”

암사동 시절 메질을 하던 동생 상남 씨는 떡장사를 한다고 한동안 외도(?)를 했다. 하루에 떡쌀이 열 가마가 소요될 정도로 한때 큰돈을 벌었지만 빚보증 한 번 잘못 섰다 거덜났단다. 12년 만에 대장간으로 돌아와 “1년만 하겠다”고 했지만 다시 시작한 동생의 메질은 벌써 10년째다.

무당집에서 요청한 작두가 화덕을 벌써 열 번 넘게 들락거렸는 데도, 류씨 형제는 “대여섯 번은 더 담금질을 해야 한다”며 화덕에 괴탄(정제 안 된 연탄)을 새로 채워넣고 불을 붙였다. 이들에게 작두 3개쯤은 반나절이면 뚝딱이다. 그 다음에는 무당 칼 두 개도 새로 만들 참이다.

형제대장간 시랑 위에는 형제들이 만든 호미와 장도리가 무더기로 쌓여 있다. 문고리·곡괭이·쇠스랑·낫·칼·도끼 등 낯익은 농기구도 수십 가지이고, 약초나 수석 캐는 쇠스랑 등 일반인한테는 ‘잘 눈에 안 띄는’ 연장도 널려 있다. 하지만 대장장이들은 호미 한 자루도 자신이 만든 연장은 단박에 알아본다고 한다.

“싸구려 중국 농기구들과 경쟁 힘들어”

상준 씨가 모래내에서 처음 풀무질을 할 때 하루 일당이 그 호미 한 자루였다. 호미 한 자루 가격이 50원 하던 시절인데, 한 달 일하면 쌀 너 말을 살 수 있는 돈이 모였다.

“하지만 지금 농기구는 힘들어졌어요. 중국에서 주물로 만든 싸구려 호미가 대량으로 들어오거든. 요즘 농약가게나 씨앗가게, 철물점에서 파는 것들이 대부분 그런 거예요. 우리 쪽에서 중국으로 건너간 대장간도 많거든요.”

형제대장간에는 최근 들어 “농기구보다 공사장에서 쓰는 건축도구 주문이 많아졌다”고 한다. 못을 빼는 데 사용하는 ‘빠루(노루발 못 뽑기)’ 같은 연장은 개성공단에서 한 번은 2,000개씩 대량주문이 들어왔는데 개당 가격이 1만5,000원이나 돼 돈벌이도 쏠쏠했단다.

그의 대장 솜씨가 많이 알려지면서 방송국에서도 주문이 몰린다. 지난해에는 <연개소문>과 <태왕사신기> 제작팀에서 옛날 도구들을 주문해 가져갔다. 이때 주문한 도구 중에는 이미 만들어본 물건보다 난생 처음 대하는 물건이 더 많았다고 한다. 상준 씨는 그때마다 마치 색종이를 접듯 쇠를 주물러 눈 깜짝할 새에 물건을 만들어내 주문자들을 놀라게 한다.

“자동차 스프링을 잘라 조경 곡괭이 하나를 만들고, 철근 10cm로 엿가위 두 개를 만들어요. 뭐든 그려온 대로 만들어주니 방송국이든 건설업자든 다 좋아하지. 이제는 그림이나 사진만 있으면 눈썰미로 다 만들어낼 수 있어요.”

그런 솜씨를 인정받아 상준 씨는 2005년 치우금속공예관에 50가지가 넘는 농기구를 만들어 전시하기도 했다. 초등학교에서도 대장간 견학 요청이 쇄도한다. 류씨 형제는 그래서 대장간 말고도 공방을 빨리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대장간이 비좁아 위험하고, 견학에도 불편하기 때문이다.

대장장이 인생에 늘 햇볕만 비추는 것은 아니다. 연중 365일 안 거르고 쇠붙이를 두드리다 보니 술을 입에 달고 살아야 한단다.

“형이 고생한 이야기를 하면 한도 끝도 없어요. 일복은 타고났죠. 아침에 눈 뜨면 일해야 하고, 잠자리에 들면 그냥 잠에 빠진다니까.”(동생 상남 씨)

“모래내 대장간 시절 3명이 둘러치면 메가 땅에 떨어질 시간이 없었어. 고무신에 땀이 고여 미끈거려 새끼줄로 발목에 잡아매고 일할 정도였어.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노는 것이나 마찬가지지.”(형 상준 씨)
풍무 보는 사람, 메 잡는 메질꾼, 집게 잡는 대장장이가 서로 분업했던 시절 이야기다.

▶덕흥권투체육관의 김병하 관장은 30년 가까이 권투 도장을 운영하면서 동양챔피언과 한국챔피언, 올림픽 국가대표 여럿을 키워냈다. 김 관장이 한 수련생을 위해 자신의 땀과 눈물이 밴 샌드백을 잡아 주고 있다.

6 권투도장
서울 번동 덕흥권투체육관
“권투 중계에 온 국민 울고 웃던 때는 옛말”

“기자님, 요새 권투선수 개런티가 얼마인 줄은 아세요?”“글쎄요….”

덕흥권투체육관 김병하(57) 관장은 지체하지 않고 스스로 질문에 답했다.

“4라운드 경기가 40만 원. 이게 10년 전 가격이에요. 그러면 요즘 중국집 자장면 배달원 월급이 얼마나 되느냐? 어디 가서 물어봐도 120만 원은 족히 됩니다. 40만 원 중에서 대전료 20만 원 주고 나면 이게 뭡니까? 이래서야 권투선수 할 사람이 없어요.”

돈 없는 곳에 선수 없다는 말이다. 대전료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현재 일본 챔피언 200만 엔과 한국 챔피언 200만 원의 대전료 사이에는 10배의 간극이 있다. 공짜 시합 벌여도 관중이 안 찾는 이유다.

“우스갯소리지만, 대통령이 권투를 좋아해야 권투가 사는 모양입니다. 과거 전두환 대통령이 가장 권투 중계를 즐겨봤다는데, 그때 방송국들이 자정 넘어 권투 중계를 하자 대통령이 ‘여러분은 잠 안 자고 권투 봅니까’라고 했는데, 그 뒤로 9시 반으로 권투 중계가 당겨졌다는 말입니다. 그때가 우리 권투의 전성기 아닙니까?”

흑백TV 앞으로 코흘리개들을 그러모았던 프로레슬링에 이어 프로복싱이 온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도 비슷한 때다. 김기수·유제두·홍수환·박종팔·염동균·김태식·박찬희·문성길·유명우·장정구…. 기라성 같은 세계 챔프들 말고도 미국의 콘크리트 바닥에 쓰러졌던 김득구 같은 비운의 복서도 결코 잊을 수 없다.

“프로선수 파이트머니가 자장면 배달부 수준은 돼야”

그 시절 학생들의 쉬는 시간이든, 직장인들의 술자리든 홍수환의 ‘칠전팔기’ 신화와 김태식의 펀치 세례, 문성길의 돌주먹, 박찬희의 다람쥐 같은 아웃복싱만큼 좋은 안줏거리가 또 있었을까? 한동안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에서도 아마추어 권투대표선수들의 금메달 소식을 기다리며 밤을 하얗게 새운 날은 또 얼마나 많았던지.

그런 한국 권투가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지금은 세계 타이틀을 보유한 한국 복서가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관심이 멀어진 상황이다. 세계 타이틀이 아니라면 방송 중계도 어렵단다. 후원도 없고, 길거리에서 복싱체육관 간판도 사라졌다.

프로레슬링만큼이나 권투가 인기 끌던 시절, 김 관장은 일찍이 지도자의 길로 나섰다. 1976년 한국 주니어라이트급 타이틀매치에서 이이다노에게 패한 뒤 그는 링을 떠났다. 1980년 신림동에 덕흥체육관의 문을 연 뒤 지도자로서 그는 ‘여한 없는’ 세월을 보냈다고 했다.

동양 미들급 챔피언 송기연과 올림픽 국가대표 조동범, 한국 챔피언인 최강·돌석·송화영·박용수·신팔만 같은 선수가 김 관장에게 ‘발 떼기’를 배웠다. 김 관장은 특히 1993년 아시아 선수 가운데 처음으로 송기연을 미국에 데려가 미들급 타이틀매치를 벌여 세계 권투계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덕흥체육관의 최전성기를 꼽으라면 역시 1980년대 중반. 신림동 덕흥체육관에 소속된 선수들만 40명에 달했다. 선수들은 25평 남짓한 움막 같은 지하실 체육관에서 군말 없이 먹고 자면서 훈련을 견뎌냈다.

김 관장 부인도 시합 나가는 선수를 집으로 데려다 밥을 해먹이면서 온갖 고생을 다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김 관장은 1991년 한국권투협회(KBC)가 마지막으로 선정한 ‘최우수 관장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세계 챔피언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정통 복싱을 가르치는 데 전력을 다했어요. 내 집까지 팔아 선수들 밥 지어 먹였지만 후회는 안 해요. 선수로서는 화려하지 못했지만, 선수들 키우면서 화려했으니 원은 없지.”

3년 전에 옮겨온 서울 번동의 체육관은 신림동 시절에 비하면 ‘호텔’ 수준이란다. 서울 시내에 60평 되는 복싱 체육관도 드물다. 번동으로 옮겨온 뒤 덕흥체육관은 지난해까지 402명의 신규 회원을 모았고, 올해 새로 입관한 회원도 56명이나 된다. 그 가운데는 여성회원도 15명이나 된다.

올 들어서 서울에는 뜻밖에도 권투체육관 설립 붐이 일고 있단다. 그 수가 70곳을 넘어섰다.

“그게 다 다이어트 복싱이고, 즐기는 복싱이거든. 실질적인 복싱은 죽었지만 복싱 저변이 넓어지고 있다는 데 의미를 두어야겠지요. 그래도 대전료가 자장면 배달원 월급 정도는 돼야 권투 하려는 사람이 모이지 않을까?”

▶서울 용답동·전농동·당고개, 그리고 구리시를 돌며 30년 넘게 연탄 지게질을 해왔지만 아직도 건강한 미소를 간직한 ooo 씨. 한동안 뜸했지만 최근 들어 연탄 주문이 조금씩 늘고 있다며 웃었다.

7 연탄집
서울 당고개 골목연탄
매듭 꼰 새끼에 매달린 검은 연탄 두 장

가을바람이 쌀쌀해지면 서민들의 애환이 서린 연탄과 관련된 짠한 생각들이 떠오른다. 그 많던 연탄가스 중독사고며, 갱도에 매몰돼 하릴없이 목숨을 잃어야 했던 석탄 광부 가족들의 절규도 말이다.

늦가을이 되면 주부들은 김장 걱정을 시작하고, 남편들은 겨우내 땔 연탄 걱정으로 머리를 싸매야 했다. 기름보일러가 보편화하고 달동네가 속속 재개발되면서 연탄집 구경하기가 어려워진 세상이다.

인터넷에서는 ‘연탄구이집’과 ‘연탄집’을 마치 동의어처럼 쓰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요즘에는 삼천리연탄·동원연탄·대성연탄이라는 간판만 봐도 그 옛날 골목길에서 마주치던 연탄집 아저씨의 순진한 미소가 떠오른다.

서울 지하철 4호선 종점인 당고개역. 개발에서 밀려 아직 달동네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상계3동 109번지 일대의 골목길에는 연탄가게가 한 곳 남아있다. 정겹게도 상호가 ‘골목연탄’이란다. 그 집 주위로도 30년 넘게 골목을 지켰다는 이발관과 양장점, 통닭집, 그리고 점집도 십수 개 몰려 있다.

이 골목에서만 21년째 연탄가게를 해온 김만진(61) 씨는 “요즘에는 겨울에도 하루 1,000장 주문이 쉽지 않다”고 말한다. 김씨가 감당하는 배달지역은 노원구 전역. 그가 말하는 요즘 연탄 때는 이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아무래도 나이 많은 노인이 계신 집이 많아. 재작년부터 기름값이 워낙 뛰어서인지 업소들의 주문이 점점 늘어나는 것 같고.”

쌀가게·구멍가게 하면서 연탄 배달

그의 연탄 배달 이력은 꼬박 30년이 넘는다. 서울 동대문구 용답동과 전농동, 구리 토평동에서 구멍가게를 하면서 연탄 배달을 병행했기 때문이다. 당고개에 집을 사 이사한 뒤로는 연탄 배달로만 생계를 꾸렸다고 했다.

“그때는 쌀가게에서도, 구멍가게에서도 다 연탄 팔던 시절이었어. 그런데도 주문전화가 많아 화장실 갈 새가 없을 때도 있었어요. 생각해보면 그것을 어떻게 다 배달했는지 신기하기도 해.”

김씨는 “많이 판 날은 포터 트럭 두 대 분량인 3,500장을 배달한 적도 있다”고 했다. 그는 또 “옛날 19공탄은 지금의 22공탄보다 무게도 무거웠지만 연탄을 8장씩 집게로 들어도 무거운 줄 몰랐다”고 했다.

연중 음력 동짓달과 섣달이 연탄장수에게는 가장 바쁜 계절이었다. 부잣집에서야 가을에 미리 차떼기로 연탄을 배달시켰지만, 하루 벌어 먹고사는 가난한 동네에서는 저녁때쯤 매듭지은 새끼에 두어 장씩 연탄을 끼워 들고 언덕길을 오르던 가장들의 모습도 쉬 볼 수 있었다.

김씨는 젊을 때는 서울 공덕동의 성냥공장에서 일했다. 반장까지 했는데 동생이 롯데제과 판매원을 권유해 과자를 실은 리어카를 끌고 구멍가게를 돌아다녔다. 그곳이 용답동과 장안평 일대였다. 그러다 구멍가게를 냈고, 나중에는 연탄 배달까지 시작했다.

나이가 들면서 리어카 끌기가 힘들어지자 그는 마장동 중앙시장에서 엔진 달린 리어카를 주문생산해 지금까지 이용해 왔다.

“그래도 몸이 아파 연탄 배달 못 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이때껏 감기 앓고 누워본 적도 한 번도 없고. 그렇게 돌아다녀도 어깨가 아플 때는 있었지만 다리 아픈 줄은 몰랐어. 밤에 잠들면 그마저 그만이고.”

148cm의 작은 키지만 그는 “건강한 신체를 주신 부모님께 늘 감사한다”고 말했다.

그는 “연탄장수는 담배를 끊어야 오래 산다는데 틈만 나면 손이 주머니 담뱃갑으로 간다니께”라면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의 말로는 이제 상계동에만 연탄가게가 4개 남았다고 한다. 하계동 산동네에도 한두 곳이 남았을 뿐이다.
“이곳이 뉴타운이 되네, 어쩌네 말이 많아 걱정이야. 몸이 안 좋지만 때가 되면 다른 데 가서 할 수도 있겠지. 전화번호만 있으면 노원구는 다 배달되거든.”

요즘 연탄 배달은 온라인을 이용해 더 광역화되고 더 빨라졌다. 환갑 나이인 김씨의 연탄가게 옆에 미니트럭이 잘 주차된 것도 그러한 시대 조류를 탄 것이다.

글·김홍균_월간중앙 차장 / 사진·권태균_월간중앙 사진팀장 redkim@joongang.co.kr / photocivic@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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