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시의 삶』진지한 접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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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수입된 후 1년이 넘도록 창고에서 잠자던 영화 『집시의 시간』이 드디어 일반 관객에게 선보인다.
88년에 만들어진 이 유고영화는 이미 세계적인 걸작이란 평가를 받은 작품이지만 국내에선 흥행성이 없다는 판단 탓인지 극장을 잡지 못한채 변두리를 맴돌기만 했었다.
『아빠는 출장 중』으로 국내에 알려진 에밀 쿠스트리차가 오랜 준비기간 끝에 완성한 이 영화는 집시들의 야성적이고 자유분방한 삶을 통해 현실과 환상이 구분되지 않는 시적인 세계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유고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집시의 사생아로 태어난 소년 페란은 심령술사인 할머니 바바 밑에서 성장한다.
페란은 이웃집 소녀 아즈라와 사랑에 빠지지만 아즈라의 어머니는 그들의 결혼을 반대한다. 페란에게는 결혼의 가장 중요한 조건인 지참금이 없었기 때문이다.
역시 집시인 아흐메드와 함께 이탈리아로 나가게된 페란은 그의 속임수에 넘어가 도둑질·구걸 등을 일삼는 생활에 빠지게 된다. 아흐메드가 자신을 농락했음을 깨달은 그는 점차 인간과 세계에 대한 신뢰감을 상실하게 된다.
페란의 성장과정을 통해 한 순수한 영혼이 어떻게 상처받고 황폐해지는가를 그리고 있는 이 영화는 집시들의 생활·문화를 구경거리의 차원이 아닌 진지한 관심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래서 집시들의 뿌리뽑힌 삶이 결국 근대적인 삶의 대가로 우리가 치러야 했던 정신적인 황폐함과 동일선상에 있음을 넌지시 암시하고 있다.
이 작품은 표현 형식이란 면에서도 영화고유의 「꿈꾸게 하는 능력」을 극대화시키고 있다.
때로는 신비롭게, 때로는 사실적으로 묘사되는 극의 구성은 현실과 환상의 구분이 더 이상 무의미한 공간으로 관객을 이끈다.
지극히 환상적인 화면 구성은 또 집시들의 빈곤한 삶의 조건에 배어있는 깊은 슬픔을 감동적으로 포착해낸다. <임재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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