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어지는 유럽통화 붙잡기/독 전격 금리인하 배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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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영 파운드·이 리라등에 숨통/실업자 급증… 불황탈출 위한 고육책
독일의 중앙은행인 분데스방크가 지난해 9월14일에 이어 4일 다시 재할인 금리와 롬바르트금리를 인하한 것은 무엇보다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유럽외환시장의 위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독일통일 이후 독일의 고금리와 이로 인한 마르크화의 강세로 그간 유럽외환시장은 바람잘 날이 없었다.
환율조정장치(ERM)가 규정하는 대마르크화 환율변동폭(2.25%,영국·스페인·포루투갈은 6%)의 하한선까지 밀리던 영국 파운드화와 이탈리아 리라화는 결국 지난해 가을 ERM에서 잠정 탈퇴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프랑스 프랑화,스페인 페세타화,포르투갈 에스쿠도화 등 마르크를 제외한 거의 모든 유럽통화에 위기가 닥쳐 분데스방크는 이를 안정시키기 위해 대규모 시장개입에 나서는 등 출혈을 감수해야 했다.
유럽통화의지를 실험이라도 하듯 덤비는 국제환투기꾼들과 분데스방크의 싸움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데 최근엔 파운드화와 덴마크 크로네화가 다시 이들의 전장이 됐다. 파운드화는 3일 프랑크푸르트외환시장에서 대마르크화 사상 최저수준인 1대 2.353을 기록했고,4일 분데스방크와 프랑스·네덜란드·벨기에의 중앙은행은 하한선까지 폭락한 크로네화를 지키기 위해 대거 외환시장에 개입,크로네화를 매입했다.
통일당시의 통화증발로 인한 인플레를 잡기 위한 독일의 고금리정책은 이처럼 주변국들의 비난 대상이 됐지만 「중앙은행독립」의 대명사인 분데스방크는 요지부동이었다. 분데스방크의 이같은 정책은 독일정부측과도 종종 마찰을 빚어왔다. 구동독,나아가 독일전체의 실업을 줄이고 생산·수출을 늘리는 등 불경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투자가 급선무인데 고금리정책이 이를 막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분데스방크는 성장보다는 안정이,그것도 자국의 안정이 우선이라는 논리로 이에 맞서왔다.
분데스방크가 이번의 전격금리인하를 계기로 종래의 안정위주 원론적 통화정책에서 한걸음 후퇴해 앞으로 실물경제에 보다 유연하게 대처하는 등 정부측과 협조하는 금융정책을 택할 가능성도 조심스레 제기되고 있다. 마르크화의 가치유지,즉 인플레 방지도 중요하지만 실업자가 3백만명을 돌파한 현실을 무시할 수만도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유럽의 환율안정과 통화통합의 기반조성을 목표로한 유럽통화제도(EMS)는 이미 신뢰성에 심각한 금이 가 있다. 지난해 9월이후 영국·이탈리아가 ERM에서 탈퇴한데 이어 스페인·포르투갈과 최근에는 아일랜드가 투기압력에 굴복해 기준환율을 변경했다. 비교적 경제가 견실한 덴마크통화에 대해서까지 투기압력이 몰리는 상황이고 보면 통화통합을 위한 마지막 보루로 여겨지고 있는 마르크·프랑의 연대가 언제까지 계속된다고 낙관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각국의 서로 다른 경제여건을 무시한채 환율변동폭을 일정범위내로 인위적으로 묶어두는 시스팀이 바로 ERM이다. 경제형편이 괜찮을 때는 별 문제가 없지만 경제가 어려워지면 인위적 조작의 결과로 왜곡된 부분이 터져나오게 마련이다. 유럽경제는 전후 최악이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다. 경제가 악화될수록 외환제도의 왜곡구조는 심화될 수 밖에 없고 그러면 그럴수록 통화통합의 꿈은 멀어지게 된다는데 근본적인 딜레마가 있는 것이다.
유럽의 경기침체가 계속되는 한 4일 단행된 독일의 소폭적인 금리 인하에도 불구하고 EMS의 혼란은 계속되리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베를린=유재식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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