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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적주의로는 선진국이 될 수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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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어느샌가 우리 사회는 실적이 가치판단의 중심인 사회가 됐다. 스스럼없이 주가로 기업의 서열을 매기고 연봉이라는 잣대로 샐러리맨의 우열을 잰다.

 이를 두고 사회 발전이라 칭송하는 사람도 없지 않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실적주의로는 선진국이 될 수 없다. 당돌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기업의 현장을 책임진 중간관리자라면 다들 어렴풋이 느끼는 바이기도 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실적주의란 단기간의 실적에 주목하는 것인 데 반해 선진국이 된다는 것은 장기간의 투자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실제 우리 사회에 실적주의가 만연하면서 장기적 투자는 탄성을 잃었다. 최근 상당수 기업이 수익을 내면서도 그것을 재투자하지 않고 현금으로 보유하는 사실이 이를 잘 보여 준다. 더 심각한 것은 인적 자원 투자이다. 500인 이상 대기업의 경우 외환위기 시의 대폭 삭감 후에도 최근까지 인적 투자가 가장 필요한 20대의 고용을 16%, 30대의 고용을 8%나 더 줄였다.

 조직 내는 어떤가. 실적주의로 소수의 고액 연봉자가 탄생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도 장기적 성장보다는 눈앞의 실적에 급급하는 경향이 크다. 한편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고 여기는 다수는 더 많이 받는 자를 질투하거나 일할 의욕을 잃거나 아니면 미련을 끊고 회사를 떠난다. 이런 풍토 속에서 10년, 20년 뒤 회사의 장래를 책임질 인재가 육성되리라 보기는 힘들다.

 이렇게 얘기하면 실적주의는 세계적 흐름이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맞는 얘기다. 하지만 구별해야 할 것이 있다. 성장기와 성숙기는 다르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성장기의 미국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전혀 실적주의가 아니었다. 그후 금융이 산업의 주도권을 쥐고 펀드가 성행하면서 실적주의로 되었다. 하지만 그 대가도 적지 않았다. 장기적 경쟁력을 필요로 하는 제조업이 몰락한 것이다. 과연 우리는 금융업으로 먹고 살 단계에 이미 들어선 것일까.

 물론 제조업으로 먹고산다고 해도 세계화란 흐름이 실적주의를 비켜가게 하지는 않는다. 일본의 경우도 90년대 이후 실적주의의 영향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하지만 이를 견제하는 움직임도 만만치 않다. 언젠가 미국 신용평가기관인 무디스가 “고용 유지가 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린다”며 도요타의 신용등급을 끌어내렸을 때 도요타가 이에 저항한 얘기는 너무도 유명하다. 도요타는 내부적으로도 실적과 급여를 직접 연동시키지 않고 장기적 능력과 연계해 평가한다. 이런 가운데 도쿄대학의 한 경영학교수는 “성과주의는 다 글렀다. 일본식 연공제가 제일 맞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나섰다.

 대기업뿐만이 아니다. 주켄(樹硏)은 100명 남짓의 종업원으로 직경 0.15㎜의 세계에서 가장 작은 기어를 만들어 내는 회사다. 이 회사에 개발을 전담하는 기술자는 없다. 대신 입사시험도 없이 선착순으로 들어온 근로자들이 오로지 장인정신으로 신제품을 제작한다. 급여는 완전한 연공급이다. 마쓰우라 사장은 잘라 말한다. “경영자의 임무는 평소 절약한 돈으로 근로자에게 좋은 기계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에게 가장 큰 모티베이션이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균형감각이다. 즉 실적이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장기적 실적이 중요한 것이고 돈만이 아니라 일 자체에 보람을 느끼고 장기적으로 스스로를 일구는 내적 동기가 필요한 것이다.

 돌이켜 보면 외환위기가 분수령이었다. 그때 우린 방만한 차입 경영을 고치되 성장 전망을 갖는 경영으로 방향을 틀었어야 했다. 먹고살기 위한 일률적 급여 체계를 개선하되 장기적 능력 개발을 촉진하는 보수 체계로 가져갔어야 했다. 하지만 현실은 장기를 희생한 단기적 실적주의가 되고 말았다.

 40대라면 한번쯤 신명나게 일해 본 경험을 누구나 갖고 있다. 20대도 그냥 돈만을 원하지는 않는다. 장래를 기약 못 하는 기업과 근로자를 가지고 선진국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장기적 전망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 너무나 절실하다.

우종원 일본 국립사이타마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