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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처럼 번지는 대학 평교수들의 '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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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3일 오후 서울대 교수회관에서 40여 명의 교수들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대평의원회 회의가 열렸다. 평의원회는 이번 주 내로 운영위원회를 열고 입장 표명 여부를 논의하기로 했다.[사진=김태성 기자]


2일 오후 6시 서울 연세대 동문회관. 이 대학 1800명의 교수를 대표하는 교수평의회의 임원진 6명이 긴급 회동했다. 평의회 의장인 이상조(기계공학) 교수와 부회장인 홍용우(의과대).노정선(문리대) 교수, 간사를 맡은 김진영(문과대).진영재(사회대).이상호(공과대) 교수였다.

이 의장이 말문을 열었다. "내신 실질반영비율 50% 확대를 둘러싼 혼선이 가중되고, 노무현 대통령과 총장들의 청와대 토론 이후 대학 자율 문제가 쟁점이 되고 있습니다. 교수들이 우리도 입장을 정리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교수평의회에 e-메일과 전화를 많이 해와 의견을 모으려고 모셨습니다."

그러자 다양한 의견이 쏟아졌다. 특히 사립대학 총장(6월 29일)과 전국대학입학처장협의회(2일)가 "대입은 대학에 맡기라"는 성명을 잇따라 발표한 데 이어 4일에는 고려대도 성명서 발표를 검토한다는 사실이 참석자들의 의지를 결연하게 만들었다. 이 의장은 "대입의 자율성과 대학의 책무성, 그리고 노 대통령의 교육관 등에 대한 난상토론이 이뤄졌다"고 전했다. 한두 시간 만에 끝날 것 같던 토론은 저녁식사를 하면서 밤 10시까지 이어졌다.

"대학은 교육하고 연구하는 기관이다. 정치 이데올로기를 대학에 적용하면 안 된다" "정부가 입시를 가지고 대학 운영의 제재 근거로 제시한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 "대통령이 대학을 자신들만 자율을 누리려는 집단으로 발언한 것은 뭔가 오해를 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교수들은 고민을 거듭하다 성명을 내기로 결정하고 초안을 잡기 시작했다. 정부에 반기를 드는 것으로 오해 살까봐 문구 하나하나에 신경을 썼다. 한 참석 교수는 "입시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넣지 않기로 했다"며 "논의의 초점은 수험생 혼란을 하루빨리 없애고 대학의 발전을 꾀하자는 데 맞춰졌다"고 말했다. 밤 10시쯤 초안이 작성됐다. '2008학년도 대학 입시 정책 논란에 대한 연세대 교수평의회 입장'이라는 제목이었다. 1987년 '4.13 호헌' 철폐를 주장하며 시국선언을 한 지 20년 만에 전국 200개 4년제 대학 중 단일 대학으로는 처음 평교수 성명서가 채택되는 순간이었다. 교수들은 각자 더 문구를 다듬기로 하고 밤 10시30분쯤 헤어졌다. 이 의장은 3일 오전까지 교수들과 문구 조율을 마친 뒤 오후 3시 교학처에 성명서를 넘겼다. 교학처는 이날 오후 5시쯤 모든 언론사에 성명서를 보냈다. 이 의장은 "대학의 입장을 밝혔으니 정부와 대학 당국, 입학관리처에서 대화로 잘 해결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주말부터 준비=3일 오전 11시 서울 시내 모 호텔. 전국국공립대학교수회연합회(국공련) 류진춘(경북대 교수) 회장과 국공련 회장단인 서울대 교수협의회 장호완 회장, 전국사립대학교수회연합회(사교련) 최영철(단국대 교수) 이사장 등 6명이 입을 굳게 다문 채 모였다. 내신 실질반영비율 50% 확대, 8월 20일까지 입시안 제출, 기회균등할당제(저소득층 자녀 정원 외 11% 특별 입학) 등 정부의 교육정책에 대한 입장을 조율하기 위해서다. 이 모임을 위해 두 단체는 주말부터 전화로 의견을 나누고 이날을 '거사 일'로 정했다. 전국의 국공립대.사립대 교수들을 대표해 정부에 대학 자율에 대한 공동 성명을 내자고 사전에 합의한 것이다. 류 회장은 "학문의 수장인 총장들이 청와대에서 면박을 당하면서 학문의 존엄성과 교권이 훼손되는 것을 도저히 그냥 넘어가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최 이사장도 "대학들이 언제까지 정부 압박에 자율을 포기하고 비겁하게 지내야 하느냐는 일반 교수들의 의견이 많아 입장을 표명키로 했다"고 말했다. 두 단체는 오후 2시쯤 '교육 현안에 관한 공동성명서' 작성을 마치고 교육부와 언론사에 배포했다. 최 이사장은 "주말께 입장을 낼 예정이었으나 혼란이 계속돼 더 이상 늦출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양영유.천인성 기자<yangyy@joongang.co.kr>

사진=김태성 기자 <tskim@joongang.co.kr>

◆4.13 호헌 조치=1987년 4월 13일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선거인단에서 대통령을 뽑는 간접 선거제 헌법을 그대로 유지한다고 선언한 조치다. 교수들을 포함한 국민의 분노가 6.10 민주 항쟁으로 이어졌고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선 후보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골자로 하는 6.29 선언을 발표했다.

<교육현안에 관한 공동성명>

청와대 초청 대학총장 토론회에서 학문의 수장인 대학의 총장들을 우리사회의 약한 자, 소외된 자를 핍박하는 집단으로 표현하는 등 정치적 권력에 의해 우리나라 학문의 존엄성과 교권이 훼손된 것을 규탄하며 우리는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1.기회균등 할당제는 급조된 대중 인기영합적 정책으로 규정하며 이를 철회할 것을 요구한다.

2.내신반영비율 50%는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음에도 그 책임을 대학에 전가하는 행위는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

3. 강압적 졸속 입시방안을 철회하고, 각 대학의 입학전형방안을 존중할 것을 요구한다.

전국의 각 대학과 학부모 및 수험생들을 혼란에 빠뜨린 정부당국은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할 것이다.

전국국공립대학교수회연합회 상임회장 류진춘,

전국사립대학교수회연합회 이사장 최영철

연세대 교수평의회 입장(요약)

-입학 전형은 대학 고유의 임무이자 권한이다. 대학은 자신이 가르칠 학생을 그 대학의 특성과 철학에 따라 선발해야 하며, 입시 전형 기준과 세칙 또한 획일화될 수 없는 성질의 영역이다.

-대학 발전과 특성화의 기초가 되는 학원 자율성의 기본 원칙은 대학과 정부 양측에 의해 인정되고 존중되어야만 한다.

-총장 토론회에서 대통령이 언급한 '도덕적 가치'와 '경쟁력 전략'은 21세기 대학과 사회 공동의 보편적 지향점일 뿐, 결코 별개의 상호배제적 목표일 수가 없다.

-학문과 교육 이외의 정치 이데올로기를 대학 운영에 적용하거나, '도덕적 가치'와 '경쟁력 전략'을 구분하여 서로의 견제 수단으로 전락시키지는 말기 바란다.

-재정적 규제를 담보로 한 관.학 대립 구조를 강요하지 않기 바란다.

연세대 교수평의회 의장 이 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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