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우유전쟁] 27. 명재학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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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파스퇴르유업이 궤도에 들어서자 나는 갑자기 '성공한 기업인'의 대열에 끼이게 됐다. 내 경험을 들려달라는 강연 요청이 여기저기서 들어왔다. 원래 선생이 되고 싶었던 나는 이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1991년 파스퇴르유업 레슬링부가 창단됐다. 레슬링부 창단식에 참석했던 김세기 횡성군수.전용찬 횡성경찰서장.양창수 횡성군교육장 등과 얘기할 기회가 있었다. 우리는 "우리 고장의 인재가 다른 지역으로 빠져나가고 있다. 지역의 중심 고교 육성과 인재 양성 방안이 필요하다"는 데 뜻을 같이 했다. 이를 위해 먼저 기숙사가 필요하다는 현실적인 문제가 대두됐다.

나는 그들에게 영국 이튼 스쿨 방문 때를 얘기한 후 제의했다.

"우리 한번 큰 일을 해봅시다. 기숙사 운영비는 내가 댈 테니 세분은 건축.기획.추진 등의 일을 맡아 주십시오."

모두 찬성이었다. 두달 후 기숙사 건립 및 운영 계획 초안이 작성돼 횡성군교육청 회의실에서 설명회가 열렸다. 기숙사 운영 계획은 훌륭했다. 그러나 건축비와 운영비가 너무 많이 든다는 지적이 있었다. 나는 건축비와 운영비를 모두 부담하겠다고 나섰다. 기숙사 이름은 내 이름을 따 명재학사(明在學舍)로 지어졌다.

명재학사는 강원도 횡성군 읍하리 횡성고 옆 3천6백평의 군유지에 짓기로 결정했다. 사업비 18억원을 들여 1991년 9월 착공해 이듬해 초 완공됐다. 92년 3월 전국의 중학교 졸업생들 중 45명을 명재학사 1기생으로 뽑았다. 이들에게는 3년간 수업료와 숙식비.옷값(한복) 등이 면제됐다. 학생들은 횡성고 커리큘럼과 같은 교육과 함께 새벽.저녁에는 국어. 영어. 수학 등과 민족문화를 가르칠 계획이었다. 나는 명재학사 운영을 강원도교육청에 일임했다. 건물도 92년 9월 강원도에 기부채납했다.

그러나 학사 운영을 위임받은 강원도교육청은 내 요구를 받아들이는 데 한계가 있었다. 우수한 교사를 뽑아 명재학사에 집중 배치해 달라는 요구부터 벽에 부닥쳤다. 교육청은 다른 일반 고교와의 형평성 문제, 횡성고 내 일반 학생들과의 차별 등을 이유로 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전국에서 뽑은 인재들을 기존 방식대로 가르친다면 굳이 학사를 운영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이튼 스쿨에 맞먹는 '꿈의 교실'을 꿈꾸고 있었으나 교육제도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93년 제2기생 44명이 입학해 명재학사의 학생 수는 89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해가 바뀌어도 교육 목표를 달성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결단을 내렸다. 명재학사 운영 포기를 선언했다. 다만 이미 입학한 학생들에 대해서는 졸업 때까지 당초 약속대로 지원했다.

최명재 파스퇴르유업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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