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지출 장부가 없다니…”(촛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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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돈이 지출됐는데 정리된 장부가 없다는 것이 말이나 돼?』
13일 오후 경남 울산시 전하동 현대중공업 문화홍보관 3층 회계부 사무실에는 서울에서 내려온 수사관들의 고함소리만 간간이 울려퍼지고 있을 뿐 침울한 분위기가 짓누르고 있었다.
서울지검 특수1부 함귀용검사 등 수사관 12명이 들이닥쳐 현대중공업 비자금의 국민당 유입사건에 관련된 수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수사팀은 경리장부 일체를 압수한후 경리관계자들을 불러 관련전표와 회계장부상 처리과정을 추적하려 했지만 정작 수사관들앞에서 혼나고 있는 사람은 손모양(27) 등 경리담당 여직원 2명이었다.
회계담당차장 박평하씨(40) 등 간부급 관계자들은 이미 잽싸게 자리를 피해버린 후였다.
『오후 4시30분까지 지출을 확인할 수 있는 서류를 가져오지 않으면 회사 전체를 수색하겠다』는 고압적인 수사관들의 통고도 아무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순간들만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날 오후내내 수사는 계속됐지만 60여 차례에 걸쳐 지출됐다는 비자금에 관한 장부상의 처리과정을 추적하는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당장 어찌할 방법이 없어진 수사관들은 이 회사가 지난 1년동안 거래한 모든 전표와 경리서류·디스켓 등을 모두 서울로 가져가 대조해 볼 수 밖에 없다고 결론짓고 이것들을 포장하기 시작했다. 그 분량이 자그마치 라면상자로 1백상자가 넘었다.
『해당 전표만 찾을 수 있었다면 이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되는데….』
짐을 꾸리며 내어 뱉는 수사관들의 말속에는 격한 감정이 스며 있는 것 같았다. 포장된 서류들은 이날 내린 눈 때문에 부산을 경유해 열차편으로 서울로 보내졌다.
그러나 말없이 이 광경을 지켜보는 현대직원들의 시선이나 표정은 달랐다. 『이것은 분명 정치적 보복이며 넘어진 사람을 다시 짓밟는 격』이라는 것이 눈시울이 붉어진 그들의 입언저리에서 맴도는 말이었다.
세계속의 기업으로 국민들의 사랑을 받아왔던 현대중공업이 과연 제모습을 찾는 날은 언제쯤이 될 것인가.<울산=김상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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