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장자 지고, 억만장자 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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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의 기준이 백만장자에서 억만장자로 서서히 바뀌고 있다. 현재 전세계에서 통용되는 부자의 기준은 백만장자(millionaire). 백만달러가 상상을 초월한 부를 상징하던 20세기 초반 영미권에서 굳어진 표현이다. 당시 ‘도둑 남작’(robber baron)이라고 불렸던 미국 재벌 총수 정도가 백만장자라고 불렸다. 이 점을 감안하면 이때 백만달러는 현재의 10억달러에 해당하는 돈이라는 지적도 있다.

백만달러가 예전 같지 않다고 지적한 27일자 미국 <월스트리트저널>

부자에 관해 전세계적으로 가장 가장 권위 있는 통계는 투자은행인 메릴린치사와 컨설팅사인 캡제미니가 발행하는 ‘세계부자보고서(World Wealth Report)’다. 이 보고서는 매년 각국별로 백만장자의 수를 추정해 발표한다. 이 보고서에서 백만장자의 기준은, 자신이 거주하는 부동산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금융자산만 100만달러(한화 약 10억원)가 넘는 경우다. 28일에 발표된 올해 보고서는 전세계 인구의 약 1.5%인 950만명 가량이 ‘백만장자’라고 추정했다. 지난해에 비해 무려 18%나 증가한 수치다. 백만장자라는 말이 처음 쓰였을 때에 비해 부자가 지나치게 늘어나고 있는 셈이다.

이 보고서에도 이 대목을 지적한 부분이 있다. 100만달러의 금융자산가 내에서도 부의 양극화가 심각하다는 것이다. 부는 3000만달러(약 300억원) 이상의 부자에 집중되고 있는 반면 100만달러를 간신히 넘는 인구도 크게 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 보고서는 3000만달러 이상의 부자를 100만달러 이상의 ‘무늬만 부자’와 구별해서 ‘수퍼 부자’(super-rich)라고 표현한다.

100만달러로는 무위도식하기가 실제로 불가능하다는 점도 백만장자 기준의 문제다. ‘세계부자 보고서’와 때맞춰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은 ‘백만달러로는 화려한 노후를 보장받을 수 없다’는 기사를 실었다. 이 글에서는 부동산 가격과 물가 폭등으로 백만달러가 예전 같지 않다고 지적했다. 현재 100만달러는 20년 전 54만달러에 불과하고, 주요 대도시의 집 한 채 가격을 약간 웃도는 수준에 불과하다. 게다가 미국을 비롯해 전세계적으로 돈이 많이 풀린 탓에 현재의 저금리 기조가 계속된다고 본다면, 100만달러를 어디에 투자한다 해도 넉넉한 생활비가 나올 방법이 없다는 얘기다. 미국인이 가장 안정적인 투자처라고 여기는 재무성 10년 만기 채권을 살 경우, 연간 수입은 2만7000달러(약 2700만원)에 불과하다. 화려한 노후는 언감생심 꿈도 못 꾼다. 이들을 두고 부자라고 하기는 낯부끄러울 수밖에 없다.

영미권에서 백만장자 다음의 기준은 억만장자(billionaire). 엄밀한 의미에서는 우리 돈으로 1조원에 가까운 재산을 가진 사람들을 뜻한다. 따라서 이 기준으로 부자를 구분할 경우 부자의 숫자는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이 기준을 적용하기에는 아직 이른 감이 있다. 하지만 대부호로서 백만장자의 의미가 완전히 퇴색해버렸기 때문에 억만장자라는 말이 점점 더 많이 쓰일 것으로 보인다.

이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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