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이가 찾아오다 -서진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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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6일자 12∼13면 계속>
남자:꼭 와야 할 사람이라면 오시라고 말씀하지 그러셨습니까.
여자:모르겠어요. 왜 내가 그 사람을 오지 말라고 했는지. 섭섭하군요.
남자:뭐가 말입니까?
여자:당신이 있는데 그 사람을 어떻게 오라고 말을 해요.
남자:….
여자:왜 아무 말씀도 안 하시는거죠. 뭐라고 말 좀 해봐요.
남자:전 괜찮습니다. 당신이 원한다면 제 아파트로 돌아가면 됩니다.
여자: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어요. 여기 있고 싶은지, 가고 싶은지 당신은 생각도 안해요.왜, 내 아파트에 찾아왔어요?
남자:당신의 이런태도는 이해할 수가 없군요.
여자:이해할 수가 없다구요. 기가 막혀서!
남자:뭐라고 말씀 드려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전, 당신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여자:(거실을 빙빙 돌아다니며)아! 내가 미쳤어. 내가 왜 처음 보는 사람 때문에 그 사람을 오지 말라고 했을까? 오늘 만나야 했었는데. 화가 나서 오지 않겠다고 하면 어쩌지. 요즘 들어 뜸하던데.
남자:가야할 것 같군요.
여자:가지 말아요. 이렇게 만들어놓고는 가겠다니. 날 그렇게 잘 아는 사람이 이런 곤경에 빠뜨릴 수가 있어요?
남자:제가 왜 당신을 곤경에 빠뜨렸는지 알 수가 없군요.
여자:당신이 지금 제 아파트에 있는 것이 날 곤경에 빠뜨리는 것이잖아요.
남자:저는 가야겠습니다. 까닭 없이 화를 내는 당신의 모습이 보기 좋지 않습니다.
여자:내가 보기 싫다고! 당신, 절대로 못나가요.
남자:당신을 알고 싶었을 뿐이지 당신 생활에 엮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억지 부리지 마십시오.
여자: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가 있어요. 날 그렇게 알고 싶다고 하고 나서! 지금 가면 안돼요.
남자:….
여자:들어보세요. 난 혼자 있는 것이 싫어요. 특히, 이렇게 어두워져 있을 때는요. 밤에 제가 아파트 거실에서 서성거리는 것을 보셨죠. 혼자 있는 것이 불안해서 그래요.
남자:전에부터 그런 당신을 많이 보아와서 알고 있었습니다.
여자:알면서 그럴 수가 있어요?
남자: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과 제가 여기에 있어야 한다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여자:무슨 소리를 하는거예요. 불쑥 찾아와서 날 알고 싶다느니 어쩌느니 하고 나서는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요.
여자:당신도 다른 사람들하고 똑같애.
남자:무엇과 비교해서 제가 똑같은 사람인지 모르겠습니다. 깨진 유리를 조심하십시오. 그러시다가 유리조각을 밟겠습니다.
여자:(어이가 없다는 듯이 남자를 쳐다본다) 내가 유리에 베이든 말든 무슨 상관이에요.
남자:당신이 나 때문에 흥분해서 유리조각에 베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여자:그럼, 뭘 원하죠 ?
남자:제가 당신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을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여자:단지, 그것뿐이었어요?
남자:그밖에는 생각해 본 것이 없습니다. 이런 당신의 모습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여자:뭐 이래!
남자: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여자:여기까지 찾아오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면 그것뿐이 아니었을 텐데.
남자:그것 외에는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여자:당신, 미친 사람 아니예요.
남자:저는 지극히 정상입니다. 당신은 술에 취했고 약간 흥분을 한 것 같군요. 가야겠습니다.
여자:지금 가면 다시는 내 아파트 들여다볼 생각하지마. 또 아파트를 들여다보면 고발하겠어.
남자:저는 곧 다리 깁스를 풀어 버립니다. 깁스를 풀면 내키지는 않지만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당신을 볼 시간이 없을 것입니다.
여자:더 잘보이는 망원경을 사서 나를 보겠다고 했잖아요.
남자:당신을 바라볼 수 있고 아는 관계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다른 것을 원하는 것 같아 부담이 갑니다.
여자:제가 뭘 어쨌길래요. 당신이 나에 대해 알고 싶다고 해서 나를 알게 했을 뿐이에요
남자:당신은 단순히 아는 것만을 원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여자:어쩔 수가 없단 말이에요. 난, 지금 혼자 있는 것이 불안하단 말이에요. 날 좀 아는 사람한테 같이 있어 달라고 하지도 못하나요? 날 알고 싶지 않나요? 당신, 내 이름 모르죠. 알려드리고 싶어요. 내 이름은….
남자:(여자의 말을 제지하며)그만 하십시오. 당신의 이름이 뭣이든 상관없습니다.
여자: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나를 알고 싶다면서 내 이름이 상관없다니!
남자:서로의 이름을 알게되면 당신은 더욱 무언가를 요구할 것 같군요.
여자:제 이름을 알고 싶지 않다면 다른 것을 알려 드릴게요.
남자:당신이 그렇게 나온다면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습니다. 오지 말아야 할 곳을 온 것 같습니다.
여자:후회하신다 이거예요?(남자의 턱을 만지며)당신은 아직도 솜털이 보송보송한 어린애이기 때문에 알고싶지 않은 거예요. 어른이라면 많은걸 알고 싶었을 거예요.
남자:제 몸을 건드리지 마십시오. 당신의 이런 태도는 역겹습니다.
여자:당신은 날 알고 있지 않나요! 날 알고 있는 사람은 모두 이런걸 원하는데. 내가 당신을 어른으로 만들어 줄까요.
남자:내가 어떻든 간에 당신이 날 어른으로 만들 이유는 없습니다. 더 이상 불쾌한 짓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여자:(남자의 말을 무시하며)이런, 솜털이라서 면도도 제대로 하질 못했군. 내가 깨끗이 면도해 드릴게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여자:거실 안쪽으로 들어가서 면도도구를 들고 나온다.
남자:뭘 하시려는 겁니까?
여자:당신을 어른으로 만들어 드리려구요. 면도를 해드리겠어요. 우리 그이가 쓰던 거예요.참, 면도는 처음으로 해보는 거예요. 베일지 모르니까 턱을 쑥 올리세요.
남자:이 보세요.난 이런걸 원하지 않습니다.
여자:그럼 뭘 원하세요. 당신이 원하지 않더라도 난 하고 싶어요. 가만히 있어봐요. (남자의 얼굴을 면도한다) 제가 당신 얼굴에 난 솜털을 깨끗히 면도해 드릴게요.
남자:손 치우지 못해.
여자:이제야 제대로된 남자꼴을 갖추어가는군.
남자:(여자를 밀어버리고 나가려 한다)
여자:지금 나가면 경비에게 신고하겠어. 도둑이 들었다구. 잠시만 이곳에 있으면 원하는 대로 보내주겠어.
남자:가려는 행동을 멈추고 가만치 앉아 있는다.
여자:남자의 뺨에 거품을 바르고 면도를 한다.
남자:나쁜년.
여자:이젠 욕도 할 줄 아네.
남자:면도를 끝내자 여자를 떼밀고 나가려 한다.
여자:(불을 끈다. 무대 어두워진다. 소리만 들린다)
여자:잠깐만요. 잠깐만 함께 있으면 이젠 붙잡지 않을게요.
남자:…
여자:당신이 잠시만 있겠다는 것을 들어줬어요. 그러니까 당신도 잠깐만 함께 있어 달라는 나의 말을 들어줘야 해요
남자:벌써, 충분히 함께 있어 주었고 더 이상 함께 있고 싶지 않습니다.
여자:날 알고 싶다고 했죠? 하지만 당신은 날 모르고 가버리려고 해요. 난, 그것이 섭섭하군요.
남자:난, 이러고 싶지 않아.
여자:이렇게 만져주니까 기분이 좋지 않으세요.
남자:….
여자:이렇게 하는 건 어때요
남자:….
여자:제 방에 들어가요.
사이
남자가 불을 켠다.
여자와 남자 몸이 흐트러져 있다.
여자:이젠 날 알았겠죠. 어때요? 날 알고 나니까.
남자:….
여자:한 가지 사실을 더 알려드리죠. 저한테는 공짜라는 것이 없어요. 당신 아까 십만원이 있다고 했죠. 당장, 돈이 필요해요. 천만원을 빌려달라고 하지는 않을 테니까 십만원만 빌려 주세요.서비스로 면도도 해드렸잖아요. 그건 특별 서비스예요. 가끔씩 절 찾아와도 좋아요. 월요일, 수요일은 저 혼자 있는 날이에요. 앞으로는 불쑥불쑥 찾아오지 마세요.
사이
남자:(옷을 챙겨 입으며, 혼잣말로)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여자:그럼, 당신이 날 알고 있는지 아셨어요? 이젠 붙잡지 않을 테니까 가보세요.
남자:(문 있는 쪽으로 나간다)
여자:이봐요. 요즘은 어떤 별자리가 잘 보이나요.
남자:카시오페이아좌가 잘 보일 겁니다.
여자:돈 꼭 가지고 와요. 돈 받으면 망원경을 사야겠어요<끝><그림-임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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