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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도이모이”/「수교」계기로 본 현지의 속사정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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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기간시설」 투자 발등의 불/소비성 외자는 경계… 부패추방 “한창”/풍부한 자원·7천만 내수시장이 매력
베트남 관리들은 공무보다 자신의 부업에 더 열중하고 있다.
『개혁을 한다지만 위에서 시키는 일이나 적당히 하고 개인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일에 더 매달리게 됩니다.』
베트남정부의 한 관리는 현 정부의 정책에 대해 노골적으로 큰 불만을 표시했다.
중앙정부의 관리가 한달에 받는 돈은 20달러정도. 한국어 통역비가 하루 8시간 기준으로 25달러 정도이니 이것보다 적은 돈이다. 심지어 베트남 정부가 외국인 기업에 적용하는 최저임금 50달러의 40%밖에 안되는 돈이다. 『이 돈으로는 생활이 어림없습니다. 전쟁중에는 전쟁 때문에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참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전쟁이 끝난지 17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도 어려워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외무부는 영빈관을 호텔과 식당으로,외빈용 차량을 렌터카로 이용해 자체 사업을 한다. 정부 예산이 턱없이 모자라 이런 수익사업이라도 하지 않으면 그나마 보수를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다른 부처나 지방정부도 마찬가지다. 국방부도 군영빈관을 외국인용 식당으로 운영한다. 사복을 입고 있으나 계산대에 있는 여성은 소령,음식을 나르는 여직원은 중위라고 우리를 안내한 삼성물산의 곽세호지점장이 설명했다. 한 한국인 상사원이 알고 있는 하노이병원의 한 여의사도 병원에서 받는 보수는 월 30달러에 불과한데 일과후 개인진료로 월 2백달러의 소득을 올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만은 베트남 전반을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베트남정부가 지난 86년부터 도이모이(쇄신)란 이름의 개혁정책을 시작할 수 밖에 없었던 것도 그런 분위기 때문이다.
이미 베트남은 개혁·개방을 막을 수는 없는 단계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외국인의 왕래가 많아지면서 「돈」의 위력을 국민들이 실감하기 시작한 것이다. 베트남에서는 대학을 졸업해도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한 한국계 지사는 여직원 1명을 모집하는데 유학생을 포함한 수십명이 응시했으며,정부의 고위관리들까지 「청탁」을 하지만 거절해야 한다고 한다.
그나마 베트남의 외화벌이를 도와주고 있는 농업 역시 마찬가지다.
『쌀 9㎏을 팔면 1달러입니다. 토마토 5㎏을 팔면 신문 1부를 살 수 있어요. 이렇게 래서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지도부에 있는 사람들은 사회주의에 충성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경제를 살리는데 지식이 있는 사람을 써야지 사회주의에 대한 충성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 관리도 이미 사회주의의 꿈이었던 평등에 대한 욕구는 사라진 것 같다고 한다. 무상교육이 사라진뒤 농촌지역에서는 학비를 조달하기 어려워 학교를 보내지 않는 집이 많다고 한다. 다만 영어회화를 배우려는 열기는 어느나라 못지 않다. 호치민시에서 기자단 차를 운전한 운전사도 시간만 생기면 영어책을 소리내 읽고 있었다. 하노이호텔의 계산대에 앉은 청년도 그랬다. 개별적으로 돈을 벌도록 하는 정부의 새 정책이 사회주의 사회의 평등을 해치지 않느냐는 질문에도 『평등할 것이 있어야 평등하죠. 정부는 아무런 지원을 할 돈이 없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가난을 평등하게 나누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반문했다. 마치 사회주의 국가의 공무원으로부터 반공교육을 받는 것 같아 묘한 기분이 들었다.
베트남정부 관리들은 『경제봉쇄가 전쟁보다 훨씬 더 무섭다』고 말한다. 베트남이 힘없이 과거를 묻고 미국에 굴복하는 자세로 접근하는 것도 미국의 경제봉쇄 때문이다. 국제적으로도 미국의 봉쇄망을 무시하고 경제적인 접근을 할 나라가 거의 없다. 사회주의권의 붕괴이후엔 더욱 사정이 어려워졌는데 정작 자본력이 있는 일본 등은 미국에 보조를 맞추어왔다. 특히 사회간접자본에 투자할 수 있는 세계은행이나 아시아개발은행 등의 국제차관은 미국의 영향력하에 있어 베트남을 옴쭉달싹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나마 88년이후 사실상 개별농가 중심의 사영농업체제로 전환한뒤 쌀 생산이 크게 늘어나 현재 세계의 세번째 쌀수출국이 됐지만 연간 1백만t의 수출로는 국제수지를 맞추기도 어렵다. 그렇다고 경쟁할 다른 공산품도 없다.
이번 한·월 외무장관회담에서도 한국측이 특히 사회간접자본 부문에 투자해줄 것을 희망한 것도 그런 이유다.
베트남에서 또 하나의 문제는 부패다. 하노이에 있는 한 한국인 상사원은 『중앙정부에서 허가받아도 지방정부에서 사업 승인을 않고 애를 먹이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베트남 입장에서는 밀수도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실제로 외화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시장에서는 웬만한 물건은 쉽게 구할 수 있다. 베트남내 물량의 4분의 1은 밀수로 들여온 것이라고 한다. 베트남 정부는 지난해부터 이 두가지를 겨냥한 부패추방운동을 벌이고 있다. 베트남의 지도부는 경제개방정책의 방향을 놓고 고민하고 있다. 베트남은 한국의 개발정책을 연구하기 위해 전문가의 파견을 희망했지만 한국모델의 약점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그나마 국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투자도 상업 및 서비스분야에 집중되고 있다. 하노이시내에는 「비아 호이」(맥주홀)라는 이름의 선술집이나 카페가 많이 눈에 띄고,근교에서 들여온 농산물을 베트남식 지게 「야잉」에 걸고 다니는 행상이 많다. 공산품이라고 파는 것은 대부분 외국에서 들여온 것들이다. 일본이 만들어놓은 자동차판매장의 전시용차는 먼지가 뽀얗게 앉아있어 실제 거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입증해주고 있었다.
베트남정부는 그래서 외국자본만이라도 중공업이나 기간시설 등에 투자해주기를 희망하고 있다. 심지어 음식점같은 서비스업종에는 외국자본의 투자를 허가해주지 않는다고 한다. 현재 호치민시에 있는 한국식당 5∼6곳도 모두 무허가상태로 영업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한가지 베트남정부의 고민은 남북간의 격차를 해소하는 일이다. 진정한 의미의 남북통합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남북간의 사회·경제적인 격차를 해소해야 한다.
그러나 하노이는 전형적인 사회주의의 소도시 모습을 갖고 있는데 반해 호치민(구사이공)은 「3류 자본주의 수도」의 모양을 갖추고 있다. 하노이에서는 택시를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호치민시에는 외국 합작회사이긴 하나 택시가 자주 다닌다. 통일직후 호치민시내에 있는 건물의 문짝까지도 북부로 뜯어갔다고 하는데도 호치민시에는 과거의 건물들이 복구되고 있다. 무엇보다 큰 차이는 사람들의 인식문제다. 남쪽은 자본주의적인 경영법에 익숙해 있다.
이런 차이들 때문에 베트남정부가 북부지역 투자를 유도하는데 외국의 투자는 남쪽에 몰리고 있다.
이런 고민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정부와 국민들의 경제개발 의지는 한국의 60년대보다 훨씬 강력하다』는 것이 한국대사관측의 설명이다. 앞으로 5∼7년내에 태국의 경제를 앞지르는 것이 이들의 목표이며,이때쯤 이들의 개혁정책의 성패가 판가름날 것이라는 것이다.
베트남의 개혁정책을 돕는 중요한 요인은 풍부한 자원을 재산으로 한 인구 7천만명의 시장이다. 미국도 업계의 정상화 요구압력이 거세다. 클린턴행정부의 출범과 함께 관계가 정상화될 것이란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미국의 봉쇄정책 해제를 기다리고 있는 일본도 이미 지난달 해외경제협력기금으로 약 3억6천만달러의 차관을 제공하기로 했다. 또 추가차관에 관한 보도도 계속 나오고 있는 형편이다. 10대 주요상사도 이미 현지에 기반을 구축하고 있고,석유탐사사업 참여 등 주요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하노이나 호치민시내의 전자제품들도 일본제품이 휩쓸고 있다. 자동차는 도요타다. 하노이에 30만대,호치민시에 60만대에 이르는 오토바이도 혼다여야 제값을 받는다고 한다.
KOTRA호치민지사와 한국상사 관계자들은 정부와 업계가 일체가 된 일본의 진출을 매우 경계하고 있다. 일본은 정부가 수출·투자의 위험에 대한 보장을 하고 있어 대형사업에 뛰어들 수 있지만 한국의 경우 위험부담 때문에 주저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주요 프로젝트사업에 한해서라도 지불보증과 융자제공 등 정부의 지원이 있어야 한다고 KOTRA의 조 관장은 강조했다. 더군다나 아직도 베트남을 「특수지역」으로 분류해 호치민에 몰려있는 상사원들이 3개월마다 하노이로 체류허가를 받으러 가야하는 등 여러가지 불이익을 받고 있어 특수지 재분류 등 정부의 지원정책도 재조정돼야 한다는 소리가 높다.<호치민시=김진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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