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한 승복”… 패자에도 갈채를/오병상 정치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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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냉엄한 승부의 세계에서 패자는 보이지 않는 법이다. 오로지 승자를 향한 축복의 갈채와 환호가 떠들썩할 뿐이다. 분명 선거는 승패의 대결이다. 하지만 정치는 승자만 남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따라서 승패가 갈린 지금 승자만 아니라 패자에게도 갈채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패자는 의연했다. 과거와 달리 승패가 판명되자마자 『깨끗한 승복』을 선언하고 승자에게 축복을 보냈다. 바로 지난 대선때와 같은 부정선거시비는 전혀 없었다.
김대중민주당후보는 19일 아침 기자회견을 갖고 패배를 『겸허한 심정으로』 받아들이고 승자에게 『모든 분야에서 성공해 국가의 민주적 발전과 조국통일에 기여하기』를 바랐다. 그는 또 세번에 걸친 대선에서의 패배를 자신의 『부덕의 소치』로 돌리고 의원직까지 사퇴하며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그순간 눈물은 흐르지 않았지만 그의 표정은 이미 통곡하는듯 비감했다. 정주영국민당후보 역시 결과를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승자에게 『축하드린다』라고 밝혔다. 정 후보는 오전 6시에 기자회견을 가질 예정이었으나 1시간이나 늦게 나타났다. 억지로 웃는 표정이었지만 그의 태도 하나하나에는 스스로 패배를 인정하기 힘들어하는 분노가 배어 있었다. 두사람 모두 쉽지않은 결단이었다.
김대중후보 자신이 표현하듯 『파란만장한 40년의 정치생활』을 마감한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도 예사롭지 않다. 더욱이 그가 40년간 상징해온 호남의 정치,한의 정치라는 짐을 벗기는 더욱 어려운 일이다. 패배했지만 그가 얻은 33.5%의 지지는 그의 결단을 가로막기에 충분하다. 그럼에도 그는 선거결과에 깨끗이 승복하고 나아가 「양김경쟁시대의 종결」이라는 국민적 기대를 스스로 수용,정계은퇴까지 결정했다.
정주영후보 역시 패배의 인정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처럼 자신의 삶에 실패가 없었음을 자부해온 사람이다. 나아가 「설혹 실패가 있더라도 내가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실패가 아니다」라는 소신을 가진 사람이다. 따라서 그는 명백한 「실패」를 온국민 앞에 인정하는데 개인적으로 고통을 느꼈으리라 능히 짐작된다.
쉽지않은 결단의 승복이기에 더욱 갈채를 보내야할 것이다.
이제 이들에게 남은 것은 진짜 승복의 자세를 보이는 것이다. 승복은 단순히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를 인정하고 나아가 따르는 것이다. 승자인 김영삼후보를 따르라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의미다. 국민의 뜻은 패자만 아니라 승자도 따라야 한다. 이 시점에서 국민의 뜻은 갈등과 상처를 치유하는 화합과 조화의 정치일 것이다. 「승복」하는 모습처럼 한결 발전된 정치를 패자들에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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