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폭행해놓고 딴소리/유상철 특별취재반(대선 교차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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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국민당의 유세 첫머리엔 항상 「새로운 정치스타」로 소개되는 코미디언 출신 정주일의원이 「약방의 감초」로 등장한다.
14일 오후 3시 부산 사직간이운동장에서 열린 유세때도 정주영후보의 본유세에 앞서 「이주일 아닌 정주일」의원의 찬조연설이 시작됐다.
『여러분 이게 무엇이지 아십니까.』 정 의원은 최근 신문에 「민자당의 유세참석표」라고 보도된 종이쪽지를 크게 확대한 것을 청중들에게 들어보이며 『민자당이 돈을 주고 이렇게 청중을 동원하는 불법을 저지르고 있다』고 호기롭게 민자당을 비난했다.
정 의원이 「민자당 참석표」를 허공에 높이 흔들며 민자당규탄에 열을 올리고 있는 바로 그순간 공교롭게도 유세장 뒤켠에선 많은 청중들이 「국민당 참석표」를 상자에 집어넣고 있었다. 주로 아주머니들인 청중들은 지역책임자가 들고 있는 라면박스 크기의 마분지상자에 서로 먼저 집어넣기 위해 혼잡을 빚었다.
『한꺼번에 넣지 마시고 차례차례 넣으세요.』 질서를 호소하는 지역책임자는 한편으론 아주머니들이 내놓는 정주영후보의 얼굴사진이 담긴 손바닥크기의 「출석표」를 받느라,또 한편으론 누가 이를 볼까봐 황급히 감추느라 경황이 없었다.
유세장 뒤편이 시끌벅적한 이런 상황이 30여분간 진행된뒤 취재기자들이 하나 둘 이를 확인하느라 북새통 현장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서울신문 사진부 김명국기자(30)가 이 장면을 사진에 담는 순간 국민당원으로 보이는 청년 10여명이 달려들었다.
청년들은 다짜고짜 김 기자를 인근 공터로 끌고가 매질을 가하고 온갖 욕설을 하며 카메라2대와 렌즈3개 등 시가 4백만원어치의 장비를 빼앗아갔다. 청년들은 심지어 김 기자에게 『산에 파묻어 버리겠다』고 살기어린 협박까지 했다.
김 기자의 사진이 보도되면 국민당은 선거법위반의 추궁은 물론 도덕성에 큰 상처를 입을지 모른다. 그때문에 청년당원 또는 동조자들이 우발적으로 김 기자를 때렸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국민의 알권리를 충족시키기 위한 현장취재 기자를 그런 동기로 폭행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문제는 이같은 불상사에 대한 국민당측의 태도다. 취재진이 항의하자 현장의 국민당 집행부는 『기자를 폭행한 사람이 국민당 당원이 아니라 민자당 당원들일 것』이라고 태연하게 거짓말을 둘러댔다.
더욱이 중앙당 변정일대변인의 성명은 비록 「사죄」의 단서를 달았지만 외부 불순세력의 소행 가능성에 여전히 의구심을 제기했다.
그렇다면 현장에 있던 많은 국민당원들은 왜 폭행에 가담한 정체불명의 청년들을 붙잡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는가.<부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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