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박사는 한국의 정유.석유화학 공장 안전관리 분야의 개척자다. 한국이 '한강의 기적'을 이뤄낸 데는 1970년 말 건설한 중화학 공장의 역할이 컸다. 그러나 9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은 고압가스관이 얽히고설킨 정유.석유화학 공장의 안전관리에는 초보였다. 김 박사는 "고압가스 안전관리 기술은 당시만 해도 미국과 유럽 일부 국가가 독점한 최첨단 기술이었기 때문에 국내엔 거의 소개가 안 돼 있었다"고 회고했다.
미 오하이오대에서 이 분야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쉘사에 입사한 김 박사는 90년대 초부터 한국 정부와 기업에 미국의 첨단기술을 꾸준히 전수했다. 김 박사 덕분에 가스안전관리에 관한 한 한국은 일본보다 앞설 수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도 남모르는 마음고생이 많았다. "한때는 한국의 산업스파이가 아니냐는 오해도 받았다"고 말했다. 그가 그런 오해까지 받으면서 모국에 기술을 전수한 데는 포항에서 홀로 지내는 어머님 영향이 컸다. 노모는 늘 김 박사에게 "한국인임을 잊지 말고 조국에 보탬이 될 일을 하라"고 당부했다. 마침 포항과 울산에는 정유.석유화학 공장이 몰려 있었다. 덕분에 김 박사가 노모를 찾을 때마다 업계 관계자를 자주 만날 수 있었다.
김 박사는 "미국서 살아남기 위해 한국 국적을 포기한 게 항상 어머니께 죄송했는데 오늘 받은 상으로 조금이나마 마음의 짐을 던 것 같다"고 말했다.
정경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