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책임한 공약 꾸짖는 「민심」/박의준 특별취재반(대선 교차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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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우리가 한 두번 속았는가. 달콤한 공약을 내걸었다가 막상 당선되고 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외면하고 마는 것이 정치인의 속성 아닌가배.』 『될성싶은 얘기를 공약으로 내건 후보를 찍을 참이야.』
김영삼민자당후보가 영남 지역의 표밭갈이에 처음 나선 25일 점촌·안동유세장에서 만난 농민들의 얘기였다. 이곳은 이미 김대중민주당후보가 휩쓸고 간 지역이다.
각 후보들은 농민 유권자들을 겨냥,「개방화·국제화시대에 한국 농업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 그럴듯한 공약을 내걸고 있다. 농민들이 많이 살고 있는 점촌과 안동유세에는 싸늘한 날씨에도 불구,적잖은 농민들이 김 후보의 연설을 듣기위해 유세장에 나와 있었다.
유세 직전 인기 연예인들이 노래와 만담으로 유세장을 후끈 달아오르게 한 가운데 찬조연사들이 미사여구를 동원,목청을 높이자 가을걷이를 거의 끝낸 농민들은 축제 분위기에 휩싸이는듯 했다.
하지만 김 후보가 등단,공장을 세우고 도로를 놓겠다는 등 각종 보랏빛 공약을 내놓을때 농민들의 표정은 비교적 덤덤하게 보였다.
이날 오전 점촌역앞 유세중 만난 농민 장석홍씨(49·문경군)는 『모든 후보들이 농촌을 살린다고 야단인데 우리 농민들은 결코 무리를 해서 농촌을 살려달라고 요구하진 않는다. 다만 도농간의 균형있는 발전을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같은 장소에서 만난 김영복씨(35·예천군)도 『우루과이라운드가 타결되면 농민들은 더욱 살기 힘들 터이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농촌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을 고르겠다』며 『어떤 당에서는 농가부채 탕감을 들고 나오는데 재원이 어디 있어서 하는 소리인지 모르겠다』고 반문했다.
점심시간 중에 열린 안동역앞 유세에서도 비슷한 목소리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김 후보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초겨울 하늘을 날카롭게 가를 때 만난 농민 김모씨(68·안동군 도산면 서부동)의 말투는 사뭇 비장했다.
『정치인들이 말한 내용이 잘 실천되는 것 봤는가. 백 마디 말보다 한가지 실천이 중요한기라.』
이같은 농민들의 이유있는 한마디는 물론 민자당 김영삼후보만을 두고 한 얘기는 아니었다. 주문진의 김대중민주당후보 유세에서 만난 김영선씨(52·상업)는 『농어가 부채는 담보,즉 재산이 있는 사람일수록 많은데 이를 국고로 탕감한다는 것은 모순』이라고 말했다.
정치권의 무책임한 공약을 싸잡아 나무라는 준엄한 목소리로 들렸다.<안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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