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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 기자의 공개 못한 취재수첩] “공사 따낸 뒤 콧수염 달고 변장”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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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리비아 대수로. 남부 사하라사막의 지하수를 끌어 올려 북부 지중해안 도시들에 공급하기 위해 건설된 전체 길이 4000km에 이르는 거대한 송수관이다. 지금도 한창 진행 중인 세계 최대의 역사(役事)로 투입 인원만 연 2600만 명, 공사 기간이 30년에 이른다. 리비아 국가원수 무아마르 알 카다피가 녹색혁명(Green Revolution)의 기치를 걸고 시작한 프로젝트로, 그는 1984년 대수로 착공식에서 이를 “세계 8번째 불가사의”라고 자랑했다. 이 사업을 진두 지휘한 인물이 바로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현 동아방송예술대학 이사장)이다. 최 전 회장은 불굴의 의지 하나로 사회주의 나라에 뛰어들어 역사적인 성과를 이뤄냈다. 동아가 좌초하면서 빛이 바랬지만 다시 봐도 쾌재가 아닐 수 없다. 이코노미스트가 대역사의 현장을 거슬러 올라간다.


세계 1위의 광활한 사하라사막. 1983년 11월, 단일 토목공사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던 32억9000만 달러짜리 리비아 대수로(大水路) 1차 공사를 한국의 동아건설이 수주했다고 발표했다.

그 환호와 충격은 한국 국민에게 오래도록 자긍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리비아 대수로 공사는 그해 세계 10대 뉴스에 들어갔을 만큼 세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동시에 동아건설과 함께 ‘최원석’을 일약 세계적인 인물로 부상시켰다.

그러나 동아건설은 2001년 5월, 법원의 파산선고를 받는다. 45년 충남에서 설립된 후 국내 건설 도급 순위 2위까지 동아건설의 화려한 건설사(史)가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동아건설 파산 이후 대수로 공사는 동아 계열사였던 대한통운과 리비아 정부가 출자한 ‘알나흐르(ANC)’가 공동 시행하고 있다).

지금은 2500여 명의 학생이 다니고 있는 동아방송예술대학 이사장으로 제2의 인생을 걸어가고 있는 최 전 회장이지만 불행하게도 다시 태어날 가능성이 제로에 가까운 동아의 57년 역사를 무덤의 터널 속에 묻은 그를 이 시점에서 다시 만나고 있는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어서다.

이념 뛰어넘는 대수로 건설

경제에 있어서만큼은 과거를 그리워해서는 안 된다. 과거에 대한 애착을 가지면 현재가 보잘것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럼에도 한국 건설사에 큰 족적을 남긴 리비아 공사 수주 내막을 살피는 것은 동아건설 역사의 절정기를 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오늘날의 침체한 해외 건설 수주 실적을 보면서 또 한 번 세계 건설시장을 뜨겁게 달구는 ‘제2의 최원석’ 같은 대도전의 승부사가 나왔으면 하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무려 400여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는 20세기 최대의 대수로 건설 공사를 한국의 건설업체가 따냈다는 의미를 평가하기에 앞서, 리비아라는 사회주의 국가가 추구하는 그들의 미래 행복을 위해 시장경제 국가인 한국의 건설사가 참여함으로써 최초로 사회주의 국가를 지원한 기록을 남긴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것은 동과 서, 이념과 체제의 대결보다 경제가 앞선다는 것을 확인해주는 것이다.

“나 한 사람을 생각하면 안 나갔습니다. 무서울 정도였어요. 콧수염을 달고 변장을 하고 다닌 것도 사람마다 해석을 다르게 하던데, 내가 느끼는 위기를 그들이 알겠어요? 리비아 공사를 수주한 후에는 미국 근처로 출장도 못 갔습니다. 입찰에 성공한 이후에 유형·무형의 압력은 더 심하게 들어왔으니까요. 그 전에 일부 건설업체가 (리비아에)들어가 공사를 하고 있었던 것과 대수로 공사는 아예 차원이 다르지요. 리비아의 혁명이라고 했던 프로젝트 아닙니까. 리비아를 재건하는 공사였고, 그건 사회주의 국가로서 보란 듯이 서방세계에 도전하는 상징성까지 지니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러니 그만큼 나로서는 더 위험을 각오할 수밖에 없었던 거지요.”

-그런 의미가 있습니까?
“사상이다, 체제다 하는 건 정치가들이 할 얘기라고 생각했습니다. 건설쟁이는 역사적인 건설의 실체를 남기는 것하고 실적 외에는 생각하지 않아요. 전 세계에서 무수히 건설과 파괴가 반복돼 왔지만 대수로는 영원히 남을 공사니까 굉장한 매력이 있었고, 사회주의든 시장경제든 한 국가를 재건하는 일인데 따내기만 한다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됐겠습니까. 해외에서 승부를 걸겠다 하고 몸을 던졌던 겁니다. 지금 생각하면 돈으로 살 수 없는 굉장한 노하우를 얻었다고 자평합니다. 내가 얻은 것도 크지만 우리 동아, 결국은 우리나라의 자산이 된 셈이지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한국의 자산이 됩니까?
“사회주의 국가들의 생리, 국가원수와 지도자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우리만큼 철저하게 경험하고 그쪽 국민의 문화까지 속속들이 이해할 수 있는 회사가 또 있겠어요? 그동안 자유세계와 대립하느라고 정신없었던 사회주의국가들한테서 나올 수밖에 없어요. 왜, 자원이 풍부하게 남아 있는 나라들인데 자유민주주의의 행복한 맛을 알기 시작했거든요.”

69년 9월 1일. 불과 스물일곱의 나이로 혁명에 성공해 38년째 집권하고 있는 리비아아랍사회주의인민공화국, 즉 리비아의 무아마르 알 카다피 국가원수가 ‘녹색혁명’을 선언하면서 세계의 이목을 끌었던 대수로 공사는 ‘GMR(Great Man-made River)’ 공사로 불렸다.

이는 한반도 전체 면적의 약 8배에 달하는 175만9450km2의 사막을 옥토로 만들겠다는 것이 목적이었다. 식량 확보를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물이 있어야 했고, 전 국토를 거미줄처럼 연결하는 수로가 필요했다.

이처럼 엄청난 프로젝트를 맡은 동아건설은 그룹의 모든 역량을 총결집시켰다. 운도 따랐다. 사하라사막을 옥토로 바꿀 생명수가 북서부 사막과 북동쪽 사막 밑에서 발견되면서 최 전 회장은 흥분을 숨기지 못했다.

추정 매장량이 나일강을 200년 동안 흘러갔을 유수량과 맞먹는 35조에 이른다고 했다. 그때부터 ‘알라신의 선물’이라고 믿는 그 지하수를 트리폴리와 벵가지까지 운반하는 일이 동아의 1차 몫이었다. 그것은 동아의 역량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했다.

“리비아 진출을 아버님(고 최준문 창업회장)은 반대하신 걸 어떻게 알았어요? 나는 그걸 밀어붙였는데, 핫핫핫. 냉정히 보세요, 아직도 우리는 70~80년대에 투자했던 반도체·자동차·통신·조선으로 먹고살고 있는데 그걸 해외로 나간 건설업체들이 벌어들인 달러가 아니면 어떻게 세울 수 있었겠어요. 1단계 33억 달러 공사에 성공하면 2단계 64억 달러도 우리가 먹을 수 있다는 각오로 정말 전력투구했습니다.”

총 연장 1872 km의 송수관

현장을 보지 않은 사람들은 단순한 토목공사로 여기기도 했지만 특수 건축물을 완공하는 것보다 치밀하고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일이었다.

군용 지프가 드나들 수 있는 지름 4m, 길이 7.5m의 대형 특수 콘크리트관을 제작하는 것도 국제특허를 얻을 만큼의 새로운 제작물이어야 했지만, 송수관을 통해 물이 흘러가는 동안 수압으로 관이 터지거나 1단계 1870km가 넘는 그 먼 곳까지 수평이 유지되지 않거나 관을 잇는 부분으로 물이 샌다면 허사가 될 일이었다.

송수관을 묻기 위한 지하 관로를 파고 기초 토석을 까는 데만 이 프로젝트 전체의 4분의 1이 넘는 102억 달러가 투입된다는 것만으로도 단순한 토목공사가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동아는 해냈다. 공사 시작 11년7개월 만인 91년 8월 1단계 타저보에서 벵가지까지 917km, 사리르에서 시르트까지 955km, 총 연장 1872km를 일체의 하자 없이 마무리한 것이다.

하루 200만t의 물을 공급할 수 있는 송수관 연결을 완성했고, Y자 형태로 개발된다고 해서 ‘Y공사’로 불리기도 하는 64억 달러 규모의 2단계 공사에서도 자발하수나 취수장에서 수도 트리폴리까지 1670km를 연결하는 5년간의 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쳐 마침내 리비아의 숙원이었던 물 공급을 가시적으로 보여 주었다.

사우디 왕자의 전화 한 통

96년 8월, 카다피 대통령의 초청으로 세계 30여 개 나라의 국가원수급 인사들과 당시 추경석 건설교통부 장관, 최 전 회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통수식이 열린 날은 리비아 전 국민의 축제가 되기도 했다.

태어나 119만t의 물이 담긴 거대한 취수장도 그들은 처음 보았고, 1년에 비를 두 번 보면 잘 본다는 노인은 “물 색깔이 푸르다는 것도 63년 만에 처음 알았다”고 했을 정도로 통수식은 그들의 인생을 바꿔 놓을 행사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3단계 공사를 수주해야 하는 상황에서 동아는 좌절하고 만다. 외환위기 사태와 김포 매립지 공사 등 과도한 사업 확장으로 98년 5월, 최 전 회장이 대표이사직을 사임함으로써 동아와 대수로 공사가 휘청거리는 불운의 늪으로 빠져 들어간 것이다.

그러면 대수로 공사는 어떤 계기로 동아의 수중에 들어오게 됐는가. 그 내막을 뒷받침하는 다양한 증언이 있지만 대수로 공사와 관련한 첫 인터뷰는 88년 12월 리비아 현지에서 있었고, 2차 대수로 공사를 시작하고 얼마 후인 90년 9월에는 현지에서 인터뷰한 내용과 상반되는 관련자의 증언이 있었다.

그리고 동아그룹이 격랑의 파고를 타면서 법정으로 가는 과정까지 몇 차례 더 관계자 인터뷰가 있었으며 최근의 인터뷰는 지난 6월 초, 최 전 회장을 만나서였다.

79년 12월, 유영철 동아건설 부사장은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마호메트 왕자 대리인 격인 라시드가 긴급히 최 회장을 찾는다는 내용이었다. 유영철은 연세대 재학 시절 이른바 운동권이었던 인물.

그의 표현대로 “고려대의 이기택·이명박 패거리와 맞서다가 동아건설에 입사해 자전거를 몰고 다니며 현장의 전표를 끊어 주는 말단을 거쳐 부회장까지 오른” 그야말로 ‘왕초’ 기질의 두목형이었다.

“그때는 최 회장님이 어디 계신지 알아도 밝히지 못했어요. 중역이 찾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사우디 왕자가 찾는다면 모를까, 그 정도로 비밀리에 움직였어요. 물론 GMR을 수주하기 전이지만 하여간 업체들끼리도 얼마나 치열한지 회장님 동선(動線)은 그 자체가 수주에 영향을 미쳤거든요.”(유영철 전 부사장)

최 전 회장은 업계에서 알려져 있는 그대로 마치 50년대 영국 첩보기관 총수 베르디 제독처럼 그의 행적은 보안사항이었다. 그만큼 국제적인 공사 정보를 입수하고 입찰하는 과정에서 업계마다 외교전과 정보전이 난무했던 탓이었다. 그래서 최 회장이 대구에 갔다고 하면 일본에 간 것이고, 대전에 있다 하면 영국에, 대수로 수주 이후에는 행방불명이라고 할 땐 카다피를 만나고 있음을 알리는 중역들의 음어가 됐다.

-리비아에 진출하기 전에는 주로 사우디에서 수주를 하셨던 것 같습니다. 사우디 왕자 중에 영향력이 크다는 마호메트 왕자가 회장님을 찾았다면 그때 리비아 정보를 입수한 겁니까?
“그게 사실은 복잡한데요, 물론 그런 정보를 주기도 했습니다만 정보를 준다고 전부 수주가 됩니까. 나중에 얘기가 나올지 모르겠는데 리비아 대수로 입찰이 공식적으로 나오기도 전에 사우디에 있던 장비들을 엄청나게 실어 보내면서 우리가 뜻이 있다 하는 시위를 한 적이 있었어요. 핫핫. 생각해 보면 배짱도 컸지, 국제 입찰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대수로 공사가 있다는 정보만 듣고 대형 장비들을 막 실어 보내고 과시를 했으니 말이지요. 핫핫핫.”<계속>

1986년 최원석 동아그룹 회장(오른쪽)이 리비아 대수로 공사의 핵심 공정인 사리르·브레가 관 생산공장 준공식에 참석한 후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와 공장을 돌아보고 있다.

최원석 회장은 …
1943년 대전 출생. 이화여대부속고와 미국 조지타운대를 나왔다. 66년 동아콘크리이트 사장을 시작으로 77년부터 동아건설·대한통운·동아증권 등을 주요 계열사로 하는 동아그룹 총수를 지냈다. 98년 외환위기 여파로 동아가 좌초하면서 지금은 동아방송예술대학 이사장으로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기업메세나협의회 회장, 건설단체총연합회 회장 등을 지냈다.

이호·객원기자·작가 leeho52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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