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의 최고 훈장은 볼넷왕이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9면

"공은 잘 치지만 팀에는 큰 도움이 안 되는 선수."

언뜻 납득이 안 가지만 그런 선수가 꽤 있는 모양이다.

일본 프로야구 롯데 마린스의 바비 밸런타인(57) 감독은 지난해 여러 차례 한국을 찾았다. 올 시즌 LG에서 자유계약선수(FA)로 풀린 이병규(현 주니치)를 스카우트하기 위해서였다. 이병규는 1997년부터 10시즌 동안 통산 타율 0.312, 123홈런, 134도루를 기록한 전형적인 호타준족형 선수. 고민하던 롯데는 끝내 이병규를 뽑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롯데는 이병규가 볼넷은 적은 대신 삼진이 유난히 많은 사실에 주목했다. 이병규가 국내에서 볼넷을 얻은 횟수는 462차례(경기당 0.4회). 반면 삼진은 601번(경기당 0.5회)을 당했다.

박노준 SBS 해설위원은 지난해 9월 밸런타인 감독에게서 "이병규가 안타는 많은데 그에 못지않게 삼진이 많은 점이 마음에 걸린다는 말을 들었다"고 실토했다.

이병규를 뽑지 않은 이유가 자명해진 셈이다.

미국 등 야구 선진국에서는 볼넷을 우수 선수의 지표로 삼는다. 김경문 두산 감독은 "볼넷도 안타다"라고 말할 정도로 볼넷을 귀하게 여긴다. 미국 프로야구에서 통산 홈런왕을 노리는 배리본즈(43.샌프란시스코.2493회), 일본 프로야구의 전설적인 타자 오사다하루(67.소프트뱅크 감독.2390회), 한국에서 첫 2000안타의 주인공이 된 양준혁(38.삼성.1179회) 등은 나란히 그 나라의 통산 최다 볼넷 기록을 갖고 있다.

박노준 위원은 "볼넷이 많다는 것은 타자로서의 선구안, 차분함을 나타내고 투수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라며 "볼넷왕은 최다 안타 이상의 의미 있는 훈장"이라고 평가했다. 양준혁은 얼마 전 2000안타를 친 뒤 기자회견에서 "나의 기록 중 가장 깨기 힘든 것이 볼넷일 것"이라며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매우 중요한 기록"이라고 말했다. 양준혁은 또 "전에 미국 프로야구 뉴욕 메츠에서 나를 영입하려 할 때 볼넷 기록을 높이 샀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지난해 3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한국과 미국의 경기. 한국이 3-1로 앞선 4회, 미국의 투수 댄 휠러(30.휴스턴)는 2사2루에서 이승엽(31.요미우리)을 고의4구로 내보냈다. 메이저리그의 자존심이 함께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17일 이승엽은 정반대의 수모를 겪었다. 앞선 타석의 오가사와라를 두 번이나 고의4구로 출루하는 모습을 뒤에서 지켜봐야 했기 때문이다. 이승엽은 한 번은 삼진으로, 또 한 번은 범타로 물러났다.

볼넷과 삼진의 차이 만큼이나 두 선수의 팀 기여도는 격차가 커 보였다.

최선욱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