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꿈나무] 치매지만 … 할아버지 만나는 주말, 가슴이 콩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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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할아버지 찾으세요! 지금요!"

웬일인지 할아버지가 꼼짝도 하지 않는다. 아차. 배에 바람을 한 껏 불어넣고 다시 소리친다. "할.아.버.지! 찾으세요!" 지금 소리를 잘 듣지 못하는 술래와 신나게 숨바꼭질을 하고 있는 이 아이는 여덟살 올리다. '벌레먹은 사과를 팔던 옛 시절이 그립다'는 엄마의 말에 사과에 못질을 하고 벌레를 집어넣어 선물하는 사고뭉치 막내다. 할아버지를 모시러 가는 주말이면 올리는 콩닥콩닥 가슴이 뛴다. 올리는 할아버지의 '대장님'이니까. 레고로 기차를 만들고 아프리카 탐험놀이를 할 때 할아버지는 늘 "예, 대장님!"이라며 빙긋 웃어준다. 기분 좋은 건 또 있다. "이 귀여운 애들은 이름이 뭐지?" 할아버지는 누나 마이케와 형 한네스의 이름은 깜빡 깜빡 잊으면서도 올리 이름은 잊는 법이 없다.

할아버지는 요양원에 산다. 올리의 아빠가 태어났을 때부터 할아버지였다. 올리가 태어났을 때는 진짜 할아버지가 돼 있었다. 어느 해 성탄절 밤, 할아버지는 거리에서 쓰러졌다. 머리를 다쳤다고 했다. 엄마가 죽을 떠먹여 주면 아기처럼 옷에 다 흘려버렸다. 엄마 이름은 구드룬인데 어떤 날은 몰라보고, 어떤 날은 "울리케 부인"이라며 정중하게 인사를 한다. 할아버지가 다시 음식을 먹고, 말하는 방법을 배우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병이 나은 뒤에도 할아버지는 집으로 오지 않았다. 늙은 사람 돌보느라 가족들이 고생하는 게 싫어서다.

할아버지가 집에 오면 다른 형제들은 슬슬 피하기 바쁘다. 산책을 나가자고 해도 형과 누나는 숙제와 시험을 핑계대면서 꽁무니를 뺀다. 엄마도 청소를 해야한다며 아빠랑 올리에게 할아버지를 맡긴다. 할아버지랑 노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데. 가끔 놀이터에 나갔다가 할아버지가 사라져서 간이 콩알만해 지거나, 탐험 놀이를 하다 문을 잠궈버려서 마당에 서 있기도 하지만.

대개 '문제'로 접근하는 노인 얘기를 여덟살 손자 올리의 눈으로 따뜻하게 풀어놨다. 함께 책을 읽고, 목욕을 하고,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재잘거려줄 사람, 노인들에겐 영양제나 새 옷보다 그런 교감이 더 절실한게 아닐까. 스스로 요양원 행을 택하고도 "주말에 집에 올 생각에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는 할아버지의 말에 가슴 한 구석이 저릿해진다. 주름지고 거칠지만 참 따뜻햇던 할아버지의 손을 잡아본 기억이 언제였던가.

박연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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