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재가능성」소문타고 흑자기업 자금난 불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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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대우사태로 본 「금융제재설」 파장/「계수파악」이 대출중단설로 둔갑/당국은 “명백한 자금유용만 조사”
정주영국민당대표의 정치참여를 둘러싸고 현대그룹에 대한 정부의 금융·세제상 제재로 재계와 금융계가 온통 떠들썩했던 기억이 생생해서 그랬는지,김우중대우그룹회장의 정치참여여부가 관심의 초점이 된 상황에서 금융·세제상의 「대우제재 가능성」을 짚은 일반의 예상은 당국의 행보를 훨씬 앞질러 갔었다.
우리 정계와 재계의 수준에 어울리는 그럴듯한 「상상력」이었다.
29일까지 당국이 대우에 대해 취했거나 최소한 취할 의사를 공식·제재조치는 없었다.
굳이 당국의 움직임을 대우 제재와 연관지으려면 최근 재무부가 단자사 등 제2금융권의 대우 여신에 대한 「계수파악」을 했다는 것 정도다.
그러나 이 정도의 당국의 움직임을 놓고도 금융계 일부와 주변에서는 벌써 당국이 대우 제재를 위한 「예비조사」에 착수한 것이 아니냐는 민감한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대우그룹은 최근 실세금리가 떨어지고 금융기관이 대출세일에 나서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그룹과 마찬가지로 자금사정이 매우 좋았다.
최근 동양투금에서 조달했다는 5백10억원의 자금도 만기가 돌아온 기업어음을 더 싼 금리로 기업어음으로 바꾼 것일뿐 추가로 긴급자금을 확보해간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대우그룹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금융상의 제재가 가해질 가능성이 있다는 일반의 「지레짐작」은 멀쩡히 돌아가던 대우의 자금사정을 하루아침에 경색시킬 수도 있었다.
「소문」만으로도 얼마든지 흑자기업이 하루아침에 도산할 수 있는 것이 단기금융상의 생리이기 때문이다.
단자사의 한 관계자는 『해외지사를 42개나 갖고 있는 대우그룹에 대해 국내에서 앞장서서 「정치참여=금융제재」라는 창피한 공식을 강조할 필요가 무엇이냐』고 성급히 앞서갔던 일반의 예상을 못마땅해 했다.
실제로 평소에도 그럴 수 밖에 없지만,더구나 중립내각이 출범한 마당에 정부가 대우에 대해 취할 수 있었던 공식적인 입장은 『기업자금이 정치자금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은 있을 수 없다』일 수밖에 없었다.
이 경우 현대그룹에 대한 정부의 금융제재에서 보았듯이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수단은 대주주나 임원들이 기업돈을 가불해다 쓰는 이른바 「가지급금」을 끊는 것과 명백한 자금유용을 적발해내는 일이다.
이밖에 만일 비자금조성을 잡아내려면 이때는 도리없이 국세청이 들어가 장부를 몽땅 뒤지는 수 밖에는 없다.
그러나 최근 국회의 국정감사 자료에 나왔듯이 대우 그룹의 대주주나 임원이 가져다 쓰는 가지급금은 현재 한푼도 없다.
또 지난 4월 현대전자의 자금유용 혐의를 섣불리 건드렸던 당국은 명확한 증거를 들이밀지 못해 고생하다가 결국 「증권거래법 위반」으로 간신히 체면을 건지고 지나간 적도 있다.
현대때도 마찬가지였지만 당국은 「효율적인 제재」와 「기업부도」사이에서 어려운 「줄타기」를 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다.
당시 정주영회장 개인에 대해서는 효과적인 제재수단을 찾되 자칫 도가 지나쳐 현대그룹 계열사의 부도를 몰고와서는 큰일이다 싶었던 것이 당국의 말못할 고민이었다.
김우중회장의 정치불참 표명으로 이제 대우그룹에 대한 금융제재소문도 가라앉게 되었다.
그러나 정치변수와 관련해 개인은 몰라도 기업이 어려움에 빠져드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 이미 한번 「현대사태」를 겪고 「대우소문」에 긴장했던 많은 사람들의 공통적인 생각일 것이다.
기업을 「인질」삼아 정치인과 기업인이 승강이를 벌이는 것만큼 분수모르고 어리석은 일은 없기 때문이다.<김수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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