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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cover story] 어릴때 배운 한학 … 동네선 훈장님으로 통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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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영훈(47)씨는 전국 4천9백여명에 달하는 별정우체국 소속 집배원 가운데 한 사람이다. 돈이나 권력 무엇 하나 내세울 것 없는, 평범한 기능직 8급 공무원.

그러나 이곳 단월면에서 그는 조금 특별한 존재다. 하루에도 몇차례씩 동분서주하면서 동네 민원을 해결하는 심부름꾼역에다 마을의 관혼상제까지 도맡아 나선다. 동네사람들은 변씨가 우편물에 함께 얹어 배달하는 사랑과 관심이라는 '덤'이 너무나 고맙다. 그래서 퇴근 무렵 텅 비는 변씨의 우편가방엔 대신 이웃들의 정이 넘쳐흐른다.

◆ 훈장님에서 집배원으로

그는 간신히 초등학교만 마쳤다. 한글만 겨우 깨우친 실력. 학력 탓에 그가 당시 '인기 직종'이던 집배원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어릴 때 형편이 어려워 국민학교(초등학교)만 나온 뒤 집 근처 서당에 들어갔다. 어린 나이에도 못배운다는 게 서럽더라. 여섯 형제(그는 5남1녀 중 둘째다) 중 위의 셋은 나처럼 국졸이다. 그때엔 더 배우고 싶지만 돈이 없는 아이들이 대개 서당에 갔다. 거기서 5년간 한학을 배웠다. 나올 무렵 대학과 논어를 뗐다."

서당에서 실력을 쌓자 아예 훈장으로 변신했다. 그때 나이 19세였다. 2년가량 변씨는 자신처럼 진학을 못한 동네 아이들 10여명을 정성껏 가르쳤다.

어느날 형수가 조용히 그를 부르더니 주저하면서 말을 꺼냈다고 한다.

"도련님. 애들 수업료가 기껏 1년에 쌀 한가마 정도인데, 열명 가르쳐봤자 고작 열가마예요. 그걸로 장가도 가시고 애도 키우셔야 하는데 평생 그렇게 살 수 없잖아요. 그러지 말고 객지로 나가 다른 일 찾아보는 게 어떠세요."

그 말에 흔들렸다. 평생 업으로 삼으려던 훈장의 꿈이 흔들리는 순간. 방황하던 그의 운명을 바꾼 것은 바로 편지 한장이었다. 그래서 일단 일을 저질렀다. 가방 하나 달랑 메고 무조건 서울로 갔다. 한 의류 가공공장에 취직했다. 좁다란 재단실에서 2년 정도 옷감 자르는 일만 했다.

그러던 어느날 뜻밖의 편지가 한통 날아왔다.

고향에서 훈장을 하고 있을 당시 자신의 집 문칸방에서 하숙하며 랜턴 행상을 하던 사람이었다. "당신을 눈여겨 봤는데 한문 솜씨가 예사롭지 않더라. 마침 먼 친척이 단월우체국장으로 있는데 얼마전 집배원 한명이 그만 둬 사람을 찾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밑져야 본전이니 한번 찾아가 봐라."

편지를 읽자마자 "학질이라도 걸린 듯 몸이 떨려왔다"고 변씨는 회고했다. 이게 바로 운명이거니 했다.

"사실 집배원은 어릴 때부터의 꿈이었다. 지금은 우습게 들리겠지만, 각진 모자에 빨간색 자전거를 몰고 우편물을 나르던 집배원이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 없었다."

한걸음에 단월우체국으로 달려갔다. 당시엔 한글 못지않게 한문 섞인 편지도 일상적이었다. 특히 주소글씨는 대개 한자였다. 서당선생 경력이 경쟁력이 됐다. 지원자가 한명 더 있었지만 그는 2대1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거뜬히 합격했다. 1979년이었다.

서성진(61) 단월우체국장은 변씨를 뽑을 당시를 떠올리며 너털웃음을 짓는다. "이 친구를 관사로 데려가 붓과 한지 한장을 내밀었다. 그리고 벽에 걸려 있는 한자를 써보고 뜻을 풀이해 보라고 했다. 일종의 필기시험이었다. 듣던대로 정말 멋들어지게 글을 쓰고 뜻을 풀이하더라. 아, 지금 생각해보니 당시 벽에 걸린 글은 체신부 장관이 내린 근무 지침이었던 것 같다."

◆ 기쁜 소식, 슬픈 소식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6개월간의 도급직 생활을 끝내고 처음 받은 월급이 2만9천원 정도였다. 옷공장에서 받던 4만원에 비해선 턱없이 적었지만, 그래도 어릴 적 꿈을 이뤘다는 생각에 즐겁기만 했다."

그러나 근무한 지 한달쯤 지나자 '이처럼 고된 일이 어디있을까'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생각해봐라. 처음 3년은 1백리 길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걸어다녀야 했으니. 도급 시절엔 '이번달 봉급만 받으면 때려치워야지'라고 작심한 게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한달만 더 한달만 더'하다가 어찌어찌 해서 지금까지 왔다. 나는 여태 정기휴가 때와 아버님 환갑날 빼곤 단 한번도 일을 거른 적이 없다." 그나마 15년전쯤 우체국마다 오토바이가 지급돼 사정이 조금 나아졌다.

우편물 가운데 열의 하나는 좋지 않은 소식이 담긴 것이라고 한다. 가까운 친지가 죽었다거나 송사에 휘말려 법원이나 경찰서에 출두하라는 통지서 같은 것들이다. 대개 비보(悲報)는 뜻밖의 시간에 찾아온다.

"슬픈 내용이 담긴 편지를 글 모르는 이들에게 읽어준 뒤 눈물을 펑펑 쏟는 그들을 바라보노라면 정말 난감하다. '나쁜 소식이라도 내 손으로 건네주면서 다소나마 위안을 해주면 낫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한다."

기억나는 또 다른 배달물은 바로 이삿짐이다.

"한번은 오래전 이곳으로 이사온 분이 계셨다. 이삿짐을 올리지 못해 어찌할 줄 몰라 하더라. 결국 팔을 걷어붙이고 3일 동안 이삿짐을 '배달'해준 경험도 있다."

즐거운 소식을 전할 때는 당연히 변씨도 힘이 솟는다. "요즘엔 봉상리에 사는 허천용씨 집에 가는 일이 행복하다. 그 집 딸이 고3인데, 아주 영민해서 이런저런 자격증을 많이 딴다. 얼마전에도 워드.회계처리 합격 통지서를 들고 그 집을 찾았는데 마치 우리 딸한테 좋은 일이 생긴 것처럼 붕 뜬 기분이었다."

동네사람 모두가 나의 친척

지난 17일 저녁 변씨는 기자와 함께 삼가리 노인회장인 신현범(76)씨 집을 찾았다. 신씨는 반년 가까이 혼자 살고 있다. 그의 부인은 서울의 한 병원에 의식불명 상태로 누워 있다. 벌써 7개월째다. 건설 현장에서 일하다 그만 사고를 당했다.

"이 사람이 올 때마다 나는 난감하기만 해." 뜬금없는 신노인의 말에 이유를 물었다.

"글쎄 들를 때마다 '병문안이라도 가고 싶다'며 조르잖아. 매번 '가족들도 못 알아보는데 괜한 헛걸음 말어'라고 호통치지만, 이 사람 고집은 참"이라며 혀를 찬다. 그래도 신씨는 가족처럼 자신들을 아끼는 변씨가 한없이 고마운 눈치다. 본인의 말마따나 변씨에게 거의 모든 동네 사람들은 이제 '피 안 섞인 일가'가 됐다. 특히 의지할 곳 없이 홀로 사는 노인들은 그의 아버지나 어머니나 마찬가지다.

"혼자 살면 가장 힘든 게 바로 외로움이다. 그래서 전달할 편지가 없더라도 말벗이라도 해줄 생각으로 혼자 사시는 노인 댁에 들르는 게 이젠 습관이 돼버렸다."

독거 노인들은 한번 얘기를 시작하면 좀처럼 말문을 닫을 줄을 모른다. 사람과 정, 관심과 대화에 너무 굶주려 있기 때문이다. 바쁜 시간에 한 집에서 20~30분을 그대로 잡혀 있기도 한다.

"매일 이러면 안되는데 하면서도 이제 내 쪽에서 인이 박인 것 같다."

때론 빈손으로 들르기가 뭣해 구멍가게에서 사탕이나 과자 같은 '주전부리'를 사들고 방문하기도 한다.

"얼마 전엔 봉상리에 사시는 할머니에게서 귀한 선물을 받았다. 문안 인사를 드리려고 하니까 내 손에 작은 봉투를 꼭 쥐어주시더라. 열어보니 힘들게 동네 어귀 가게까지 내려가 사 온 흑설탕 한 봉지랑 귤 몇개였다. 콧등이 시큰거려서 혼났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자 잠시 머뭇거리다 "자식들이 다 도회로 나가 할머니와 사시다 몇해 전 돌아가신 장석은 할아버지"라고 대답했다.

"그 양반 자녀 중 내 또래인 아들이 안양교도소 교도관으로 근무했다. 영감님이 글을 못깨우쳐 10여년 동안 아들이 보낸 안부편지를 내가 대신 읽어주거나 답장을 써드렸다. 그랬더니 다른 자녀들 편지도 그런 식이 됐다. 생각해 봐라. 10여년간 그 집안의 모든 일을 알고 함께 고민하고 의논하는 사이가 돼버린 것이다."

노인이 결국 돌아가시자 교도관 아들이 변씨를 찾아왔다. "우리와 의형제 맺자"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둘은 지금 친동기간처럼 허물없이 지낸다.

다른 이들도 예외는 아니다. "편지를 들고가건, 고지서를 들고가건 제철에 난 농산물을 내주는 게 습관처럼 됐다. 얼마 전 마늘 수확철만 해도 이집 저집에서 마늘을 건네주는 바람에 물리치지 못하고 받아왔는데, 그게 쌓인 게 동네에서 마늘 소작농하는 분보다 더 많더라. 내가 이걸 다 받아도 되나 하고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

지난 15일엔 보룡2리에 혼자 사는 이순예(88) 할머니가 문 밖에 나와 한참이나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할머니는 지난 3년 사이에 아들과 며느리를 차례로 여의고 홀로 남게 된 노인이다.

"전날 서울에 사는 손자들이 내려와 며느리 제사를 지내고 남은 음식이 있었는데, 그걸 나에게 꼭 주고 싶어 30분가량 찬바람을 맞으며 대문 앞에 나와 있더라"고 말했다. 감격한 변씨는 할머니가 따끈하게 말아준 장국과 밥 한그릇을 뚝딱 비우고 건네준 소주 한잔까지 맛나게 들이켰다.

"심지어 어떤 분들은 공과금 낼 때 아예 통장과 도장까지 내게 맡긴다. 세상이 많이 각박해졌다고 하지만 아직 이 동네 사람 인심은 살아 있다."

혼인신고나 사망신고를 대신해 주는 것 같은 잔심부름도 대부분 그의 몫이다. 보령2리 박용복(66) 이장은 대뜸 "이 양반은 마을의 보배야"라며 "꼭 뭔가라도 해주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생각에 초여름엔 단월우체국장을 찾아가 아무 상이라도 꼭 포상해야 한다고 졸랐다"고 귀띔했다.

또 다른 이름-훈장님, 지관, 그리고 변선생님

변씨는 기자에게 몇번이고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어릴 때 익힌 한학은 지금도 그를 행복하게 한다.

"이 동네 아이들 50여명 중 한 절반은 내가 이름을 지어주었을 것이다. 작명 부탁을 받으면 대개 자정까지 '성명철학'책과 씨름한다. 사람에게 이름이 얼마나 중요한가. 어떤 사람에게 이름을 준다는 것, 보람있는 일이지만 그만큼 부담감도 크다."

그러면서 변씨는 문득 한 아이의 이름을 댔다.

"그 중 김근하라는 애가 있는데, 얼마 전 시집을 간다고 해서 날짜를 받으러 왔더라. 그때엔 진짜 내가 키운 자식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몫으로 돌아오는 일거리는 이 정도가 아니다. 그가 담당하는 동네의 '길흉화복'엔 거의 관여하다시피 한다. 결혼 날짜 잡아주는 것도 '임무' 중 하나다. 심지어 남의 생일을 바꿔 준 적도 있다. 봉상1리 변철근(69) 이장이 그 주인공이다. 자신의 생일이 추석(음력 8월 15일) 명절과 겹치는 바람에 동네 사람들을 모아 놓고 막걸리라도 한사발 못돌리는 서운함이 계속 쌓였기 때문이다. 사정을 들은 변씨가 따로 좋은 날을 잡아주었다. 변이장은 "이 친구가 바꿔준 생일날로 회갑도 치렀다"며 그의 등을 살갑게 쓰다듬었다. 먼저 세상을 뜬 이의 묏자리를 잡아준 적도 여러 번이다.

◆ 평생에 맺힌 소망 두가지

지난 25년간 변씨는 한눈 팔지 않고 우편가방만을 멨다. 이곳 단월리 산골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누볐다. 그는 자신이 걸어온 길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저녁 자리에서 소주 한잔을 걸치자 "가슴 한구석에 맺혀 있는 게 없지는 않다"고 털어놓았다. 바로 젊은 시절 한때 천직으로 여겼던 '훈장님'이다. 지난 8월 단월초등학교 교장직에서 물러난 이현곤(62)씨가 최근 간곡한 제안을 내놓은 까닭에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내년께 아이들을 모아 문화와 예술을 가르치는 체험학습장을 단월면에 만들 생각인데, 무슨 수가 있어도 당신을 한문 선생으로 초빙하겠다"는 협박 아닌 협박을 받았던 것이다. 솔직히 말해 솔깃했다. 그러나 그는 "집배원은 제 인생 그 자체다. 정년(57세) 퇴임하는 마지막 날까지 마을사람들에게 제 손으로 편지를 전해주고 싶다"며 고개를 저었다. 다만 오래 전부터 은퇴 후 계획 한가지는 확실히 세워뒀다. 서당을 차려 아이들에게 다시 한문을 가르치는 것이다. 물론 무료다.

변씨는 요즘 컴퓨터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워드프로세서 3급 자격증을 따는 일. 그래서 퇴근 때면 인근 용문면에 있는 컴퓨터 학원에 나가 시험 준비에 여념이 없다.

그렇다면 다른 꿈 한가지는? 바로 자신에게 한문을 가르친 이윤재 선생(작고)의 사당을 세우는 일이다.

"5년간 모든 지식을 전수하면서도 점치는 법만은 끝내 알려주시지 않더라고요. 선생님이 역술에도 능하셨거든요. 서당을 떠날 무렵에서야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너한테 그런 거 가르쳐줬으면 필경 엉뚱한 길로 갈게야.' 그분은 제 인생까지 고민해주신 그런 분이에요."

물론 쉽지는 않다. 선생 문하의 1백여명의 제자들은 다들 뿔뿔이 흩어져 연락 닿는 이가 거의 없다. 그래도 언젠가 선생의 고향 주변에 사당을 만들어 위패를 모시겠다는 소망은 꺼뜨리지 않고 있다.

◆ 그는 사랑에 중독됐다

저녁식사를 마친 뒤 기자는 거의 끌려가다시피 해 그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됐다. 부인 김후예(47)씨는 피곤함도 잊고 늦은 밤 따끈한 차와 과일을 내놓았다. 김씨는 새벽같이 서울 성수동 액세서리 제조 공장으로 출근해 저녁 무렵에야 집에 돌아온다.

이곳저곳 집안을 둘러보다 TV 위에 놓인 쪽지 몇장에 저절로 눈길이 멎었다.

'신랑○○○, 79년 5월 ○생, 신부 ○○○, 81년 3월 ○일생' 동네사람들이 그에게 결혼 날짜를 잡아달라고 부탁하며 내민 메모들이었다. 변씨는 "아직 내년도 달력을 구하지 못해 밀린 숙제(택일)를 못하고 있다"며 미안해했다.

서울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큰딸과 얼마 전 의무경찰로 입대한 아들 얘기 등 그가 일궈온, '작지만 소중한 행복 스토리'가 얼추 마무리될 무렵, 시계바늘은 어느새 자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다음날 새벽 5시20분.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깨보니 변씨 부부는 벌써 출근 채비가 한창이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현관 밖으로 나갔다. 아직도 휘영청 달이 떠 있다. 캄캄한 새벽. 옷섶 사이를 파고드는 매운 바람에 저절로 이까지 떨린다.

10여년 전만 해도 눈과 혹한이 몰아닥치면 매스컴에 단골로 오르내린, 그 유명한 양평의 겨울 아닌가. 어떤 신문은 겨울의 양평(楊平)에 '한평(寒平)'이라는 별명까지 붙였을 정도였다. 놋사발 위로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뜨끈한 밥과 계란찜, 그리고 두부지짐이가 오른 아침밥상을 염치없이 물린 뒤 아침 7시 출근길에 함께 나섰다.

우편물을 추스른 변씨는 언제나 그렇듯 제일 먼저 보룡2리 쪽으로 오토바이를 몬다. 그리고 버릇처럼 이순예 할머니집 대문을 두드린다. 물론 따로 전할 우편물은 없다.

"밤새 안녕하셨어요. 할머니." "이게 누구야, 변씨 아닌감."

바로 전날에도 문안 인사를 받은 할머니였지만 기쁜 마음에 다친 다리를 절룩거리면서도 대문 밖까지 달려나온다. 영락없이 멀리 도회에 살다 모처럼 찾아온 자식을 맞는 모습이다.

"나는 이 사람 때문에 하루에도 몇번씩 죽고 싶어도 참고 살어. 참 아침 묵었나. 아님, 날도 찬데 소주 한잔 내줄까."

좀더 붙잡아 두고 싶어 아쉬워하는 할머니의 눈길을 뒤로 한 채 대문을 나서는 순간, 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재너머 마을에서 걸려온 전화. 옆에서도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다 들린다.

"올 시간이 넘었는데 아직 안보이길래. 눈길에 무슨 사고라도 난 게 아닌가 걱정돼 전화했어."

"걱정마세요, 영감님. 금방 갈테니까."

그제서야 기자는 변씨가 거칠고 산세 험한 이곳 단월면을 하루도 빠짐없이 누비는 까닭을 완전히 알게 됐다. 그는 이곳 마을 주민들이 베푸는 사랑에 중독된 것이다. 그것도 단 하루라도 거르면 금단 증세로 즉시 쓰러져버릴 것 같은, 그런 지독한 사랑 말이다. 게다가 중독 증세는 변씨만 겪는 일이 아니었다. 적지않은 마을 사람들도 그의 사랑에 감염돼 똑같은 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양평 단월=표재용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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