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청 회화전 지상감상⑥-장굉의 『촌경시문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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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장굉(1577∼1652 이후)은 자를 군도, 호를 학간이라고 한 명말의 화가로 강소성 오현 출신이다.
이 지역은 명초부터 문인화가들의 집단인 오파 화가들의 활동무대로 유명하였으나 명말에 와서 오파 화풍이 침체하자 동기창(1555∼1636)과 그의 친구들이 다시금 모고(옛 그림의 본을 따름)를 주장하여 송강파를 형성함에 따라 회화활동의 핵심에서 조금 벗어나게 되었다.
장굉은 이 시기에 한편으로는 오파 화가들의 실경산수 전통을 이어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남경의 예수회 선교단을 통해 들어온 서양화의 영향을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시골의 오솔길과 사립문」이라는 소박한 제목을 가진 이『촌경시문도』는 장굉 노년기(1643)의 대작으로 그의 양식을 대표한다.
첫눈에는 여느 산수화와 별로 다르게 보이지 않으나 자세히 보면 나무와 산봉우리들이 멀리 갈수록 대기의 효과로 인하여 선명도가 단계적으로 떨어지도록 하는 대기원근법을 적용한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동양의 전통 회화기법에서도 안개묘사를 통하여 거리감과 깊이를 나타내는 기법이 일찍부터 발달하였지만 서양의 15세기 초기 르네상스 회화에서 본격적으로 발달한 대기원근법은 거리감과 공간감이 좀 더 구체적으로, 단계적으로 표현되는 것이 다르다. 오솔길이 배경으로 진행되는 과정도 방향이 엇바뀌는 대각선을 보여 실제로 공간의 깊이를 느낄 수 있게 한다.
장굉은 실경을 그린 다른 화첩의 발문에 「실제로 답사를 하니 듣던 것과 다르므로 자신의 관찰에 의해 그린다」는 글을 쓴 적도 있을 만큼 보이는 것을 충실치 묘사하는데 중점을 둔 당시로는 드문 경험주의적 화가이다. 이성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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