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진흥 「의지」가 없다|「일산출판단지」 둘러싼 정책부재를 보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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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최근 정부에서 취한 정책결정들 중 우리 출판계와 직접 관련된 것이 두가지 있다. 하나는 일산에 계획된 「출판물 종합유통센터」부지에 대한 높은 가격매김이 그것이고, 다른 하나는 공공도서관의 93년도 장서구입 예산을 전액 삭감한 것이 그것이다.
일산출판단지조합과 문화부에서는 일산의 「출판물종합유통센터」부지를 농수산물유통센터의 경우와 비슷한 가격수준에서 공급해 주도록 정부당국에 요청한 적이 있고, 전국모두 2백67개밖에 안 되는 공공도서관의 93년도 장서구입용 예산으로 국고지원 15억여원을 예산당국에 요청한 적이 있는데 이 두가지가 모두 거부된 것이다.
물론 나름대로 국가경영의 논리가 있어서 그에 따라 취해진 결정이겠으나 우리 출판인들로서는 그저 어이없고 놀라울 따름이다. 이를 보고마음 속에서 생겨나는 의문을 풀 길이 없어 이 자리를 빌려 몇 가지만 물어보려 한다.
첫째, 후진국 독일을 선진국으로 끌어올리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리스트는 그의 저서 『국민경제학체계』에서 출판문화는 곧 한 국가의 지적·정신적 산물과 문화적·교육적 가치를 담아 국민들에게 확산시키고 보존·축적함으로써 국민들의 총체적 생산능력을 증대시키는 「생산력의 생산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메커니즘이라고 하였다.
일산지역 주민들의 식탁에 오를 반찬가격을 값싸게 하기 위한 농수산물유통센터의 건설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 전체의 출판문화 수준을 한 차원 높여줄 출판물종합유통센터의 건설은 더 중요하며, 따라서 정책적 지원에서 우선순위를 차지해야 한다고 본다.
둘째, 우리나라의 경제는 더 이상 빌려온 기술과 몸으로 때우는 방식으로 성장해갈 수 없는 단계에 도달했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국민 전체의 지적·정신적 생산능력의 증대 없이는 국제경쟁에서 이길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와 같은 열악한 출판문화의 여건들, 예컨대 후진국 수준의 도서관수와 장서구입 예산이 전무한 도서관 운영, 선진국의 10%에도 못 미치는 국민 1인당 도서구독량을 갖고서도 국민들의 지적·정신적 생산능력을 증대시킬 수 있는 그 어떤 정책적 대안이 준비되어 있는가.
셋째, 모든 정부정책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선진화되고 부강한 국가」를 만드는데 있다고 이해하는데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1인당 GNP만 올라가면 되는가. 국민들의 지적·정신적·문화적·도덕적 의식수준은 상관이 없는가. 만약 이들도 함께 향상되어야 한다면 출판문화는 낙후된 채 있더라도 그것이 가능한가.
넷째, 현재의 정규교육과정과 방송매체만으로 국민교육은 완결될 수 있는가.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독서할 필요는 없고, 단지 더 열심히 일만 하고 더 많은 소득을 올려 더 많이 즐기기만 해도 국가는 계속 발전할 수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오늘날과 같은 고도산업·정보시대에는 지적 산물의 가치가 갈수록 높아지고 중요해지는 것이 국내외적 현상인데 출판문화의 발전 없이도 그러한 성취가 가능하겠는가를 묻고싶다.
이상의 의문에 대한 납득할만한 정책적 대안이 있다면 출판인들도 사명감이나 책임감 따위의 주제 넘는 생각을 들먹거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면 출판인은 정부의 출판정책부재를 통박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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