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돌던 넋 94년 만에 고향 안면도서 잠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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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고 박준의씨의 자녀가 티베트 라싸의 자택에서 태극기에 싸인 박씨의 유골함과 영정을 들고 있다. 맨 왼쪽은 신근호 한.티베트문화연구원장.[한.티베트문화연구원 제공]

죽어서도 잊지 못했던 개나리 활짝 핀 고향 언덕. 일제 강점기에 나라를 잃고 세 살 때 부모를 따라 중국과 티베트를 전전하던 한 동포의 영혼이 고향을 떠난 지 94년, 숨을 거둔 지 12년 만에 귀향한다. 충남 태안군 안면읍 황도리 출신의 고 박준의(1910~1995)씨. 그는 생전에 꿈에 그리던 고향마을의 언덕에 8일 묻힌다.

그의 귀향에는 10여 년에 걸친 신근호(63.영남이공대 교수) 한.티베트문화연구원장의 노력이 있었다. 신 원장은 "나라를 떠나 타국에서 어렵게 산 한국인의 간절한 소망을 외면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94년 만의 귀향=박씨는 일제 강점기인 1913년 부모를 따라 만주로 갔다가 아버지가 곧 죽고, 어머니도 아홉 살 때 숨져 고아가 됐다. 그는 이후 중국 인민해방군에 들어가 러시아와 쓰촨성 등지에서 근무하다 50년대 초 인민해방군이 티베트에 진주했을 때 그곳에 정착했다.

티베트인과 결혼해 3남2녀를 둔 그는 숯을 만들어 팔거나 목수 일을 해 가족을 부양하면서도 고국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현지 호적에도 한국 이름을 올렸던 박씨는 생전에 자녀에게 입버릇처럼 "내가 죽으면 압록강에 유골을 뿌려다오. 그러면 내 고향 황도리에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 원장이 이런 박씨의 사연을 안 것은 96년 3월이었다.

티베트대에 방문교수로 간 신 원장은 현지 교수로부터 60년대 이곳에 유학했던 한국 승려를 지극히 돌본 박씨에 대한 얘기를 듣고 그를 찾아나섰다. 그러나 박씨는 한 해 전 숨진 뒤였다.

자녀는 신 원장에게 아버지를 고향에 묻어달라고 부탁했다.

"역사의 희생자인 박씨의 소원을 들어주는 게 동포의 도리라고 생각했어요."

신 원장은 사비를 털어 10여 차례 티베트를 드나들며 유골 봉환에 매달렸다. 티베트족인 자녀들이 한국과 연고가 없어 유골 송환이 어렵자 중국 외교부 등에 부탁해 이들의 호적을 조선족으로 바꾸었다. 이런 노력 덕에 지난해 5월 마침내 유골의 한국 봉환이 결정됐다.

◆고향 주민이 치르는 장례=태안군과 주민들은 이런 소식을 듣고 박씨의 장례를 성대히 치르기로 했다. 황도리의 붕기풍어제보존회 회원들은 태평소 등을 연주하며 박씨의 넋을 달랠 예정이다. 묘지는 태안군이 제공했고, 경남 밀양과 대구의 사찰은 묘비를 만들어 주었다. 장례식에는 박씨의 아들 푸부툰주(35)와 주민 등 120여 명이 참석한다.

진태구(63) 태안군수는 "머나먼 티베트에 있으면서도 황도리를 잊지 않은 그를 고향에 모시는 것은 당연한 의무"라고 말했다.

대구=홍권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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