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수백명 목숨 운에 맡기는 안전불감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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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대한민국 국민은 어제 또 한번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경의선 철도 서울 가좌역의 선로 침하 사고가 일어나기 7분 전까지 열차가 사고 지점을 통과한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 문산행 통근 열차에는 승객 300여 명이 타고 있었다고 한다. 사고 2분 전에야 수색역을 출발한 목포행 무궁화호 열차가 구름다리처럼 허공에 걸린 철로 직전에서 가까스로 급정거했다. 조금만 늦게 열차가 지나갔다면 벌어졌을 대형 참사를 생각하면 아찔하기만 하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사고 위험을 모른 게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사고의 원인 제공자인 건설회사는 철로를 받치는 지반이 쓸려 내려갈 위험을 감지했음에도 열차 통행을 막지 않았다. 사고 40여 분 전 철로 옆 지하철 공사장 옹벽의 붕괴 조짐을 발견하고 공사장 인부와 장비를 모두 대피시켰음에도 수백 명의 승객이 타고 있는 열차에 대해서는 서행 요청만 한 것이다.

지하 공사장 옹벽과 선로의 거리가 좀 있고 선로 지반의 경우 단단하게 다져 있기 때문에 선로가 유실될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지만 그것은 수백 명의 목숨을 그저 운에 맡기는 안전불감증을 드러낸 것일 뿐 변명이 될 수 없다. 이미 일주일 전부터 인근 건물 외벽에 금이 가고 창문 유리가 깨지는 등 사고가 예견됐다는 게 인근 주민들의 증언이다. 대책을 세워 달라는 주민 요구는 묵살됐고 결국 일이 터지고 만 것이다.

이번 사고는 1993년 발생한 구포역 열차 전복 사고를 떠올리게 한다. 78명이 숨지고 176명이 다친 이 사고는 현장 부근에서 안전대책 없이 벌인 지하 굴착 공사로 지반이 약화된 탓으로 밝혀졌지만 건설사 대표 6명은 사고에 직접적인 책임이 없다며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런 솜방망이 처벌이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눈앞에 둔 오늘날까지 후진국형 사고가 거듭되고 있는 한 원인이기도 하다. 대형 참사가 없었다고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다. 옹벽 설계 부실 등 사고의 원인을 철저히 밝혀내 일벌백계함으로써 우리 사회에 만연한 안전불감증을 뿌리 뽑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