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휴대전화 좀 빌려주실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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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자연으로 돌아가겠다, 문명의 이기를 거부하겠다는 무슨 투철한 신념에서가 아니라 순전히 생활상의 편의에서 나는 그것들을 포기했다. 굳이 만나지 않아도 될 사람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연결해 주는 (이동통신 때문에 마지못해 접촉하는) 피곤함이 여러 차례 반복된 뒤 나는 휴대전화를 없앴다. 나는 분초를 다투는 사업을 하는 사람도 아니고 자주 연락하는 친구도 드물다. 벨이 울려 나와 아무 관계없는 광고를 받는 고역을 치르고 나면 참을 수 없이 기분이 구겨져 내 언젠가 너를 버리리라, 별렀었다. 아무리 정보화 시대라지만 내가 원하지 않는 정보나 (원하지 않는) 타인들과의 소통을 거부할 권리가 내게 있지 않을까.

휴대전화 단말기에서 나오는 전자파가 몸에 해롭다는 보도를 접한 뒤로는 녹음된 전언을 듣는 용도로만 쓰던 일방통행용 도구를 없앤다고 당장 아쉬울 게 없었고, 다달이 내는 통신요금을 절약하면 맛있는 음식이나 음악으로 나를 더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는 게 내 계산이었다.

(내가 원해 멀리했던 이동통신과 달리) 최근 우리집 컴퓨터에 이상이 생겨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인터넷 연결이 끊겼다. 접속 불량임을 알면서도 습관적으로 바탕화면에서 낯익은 아이콘을 눌러대는 검지손가락이 불쌍해 어느날 나는 마침내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지우고, 아예 노트북으로 들어가는 전화선을 떼어냈다. PC방의 컴퓨터가 정보처리 속도도 훨씬 빠르고 안전하며 이용료도 저렴했다. 실내가 어둡고 공기가 탁하다는 문제만 해결된다면 나처럼 일주일에 한두번 전자우편함을 열어보는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딱, 안성맞춤인 편의점이었다.

금연구역이라고 써 붙였는데도 아랑곳않고 담배를 피우는 청소년들을 피해 이리저리 전전하다 드디어 맘에 드는 장소를 발견했다. 그곳도 어둡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앞뒤가 트이고 공기가 비교적 청정했다. 네모난 상자 속만 총천연색으로 명멸할 뿐 그 앞에 앉은 사람의 얼굴도, 나이도, 성별도 분간할 수 없는 캄캄한 공간이 낯설었다. 밖은 대낮인데…. "왜 이렇게 어두워요?" 나의 쉬운 질문에 (관리자인 그는) "현대인은 혼자 게임에 몰두하기 위해 밀폐된 공간과 어둠을 선호한다"는 무지 어렵고 철학적인 답변으로 나를 놀랬다. 내가 작가인 줄 알고 일부러 문자를 썼나?

가끔 휴대전화가 아쉽다. 옛날에는 30분쯤 늦는 건 대수가 아니었는데, 휴대전화가 보편화된 지금은 10분만 늦어도 (늦는다고) 미리 알려줘야 한다.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어쩌다 약속된 시간에 맞추지 못하면 서울로 행차하는 버스 안에서, 전철 안에서 나는 좌불안석 초조하다. 급하면 주위를 두리번, 망설이다 옆자리 승객에게 말을 붙인다. "저, 죄송하지만 휴대전화 좀 빌려주실래요? 제가 요금 드릴게요."

(내가 늘 성공했을까?) 나의 뻔뻔스러운 청탁은 (독자 여러분의 예상과 어긋나게) 여태 한번도 거절당한 적이 없다. 내게 기꺼이 자신의 휴대전화를 건넸던 그들 중 누구도 내가 내미는 동전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물론 내가 눈치없이 아무한테나 손을 벌린 건 아니다. 내 부탁을 거절하지 않을 인상 좋은 젊은 언니만 골랐다. 팔자에 없는 동냥이 즐겁지는 않아, 타인의 체취가 밴 미지근한 기계를 내 귀에 대는 일이 꺼림칙해 요즘 나는 분명한 용건이 없으면 사람들과의 시간 약속 자체를 꺼린다.

휴대전화와 인터넷에 속박돼 쓸데없이 낭비하는 시간은 줄었지만, 그렇게 오롯이 내 것이 된 하루하루를 얼마나 생산적으로 활용했는지? 부끄럽다. 약간의 불편과 잡음은 있었으나 큰 탈 없이 한 해를 보냈다는 데 그나마 위안을 삼아야겠다. 지금까지 저를 살려주신 하느님. 감사합니다.

최영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