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만 탓하는 가전품 수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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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더위가 기승을 부렸던 지난 여름에 하필이면 세탁기가 고장 나 더욱 짜증스런 여름을 보냈었다.
그런데 여기에다 불쾌지수를 더욱 높게 만든 것은 바로 세탁기를 고치는 과정이었다. 세탁기를 만든 모회사의 고장수리센터에 전화를 걸어 곧바로 우리집을 방문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직원은 아무리 더운 날씨를 감안하더라도 너무 불친절했다.
그는 이곳저곳 세탁기를 들여다 본 뒤 한껏 퉁명스런 말투로 『세탁기를 서툴게 조작해 부품 하나가 상했군요. 부품값이 6만원정도로 비싸다는 것을 명심하시고 게다가 물건이 딸리니까 1주일은 기다리셔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제품불량일지도 모르는 것을 무조건 소비자 탓으로 돌리는 태도에 어이없어 하고 있는데 『혹시 1주일이 넘게 걸리더라도 독촉전화나 항의전화하지 마세요. 다 기억하고 있으니까요』라고 덧붙이는 것이었다.
도대체 협박인지 뭔지….
웬만하면 잘 대들지 않는 성격 탓에 그 자리에선 꾹 참았다. 그러나 1주일이 가고 2주일, 3주일이 다 돼도 감감소식이었다. 결국 다시 전화를 걸어 겨우 부품을 갈아 끼웠다. 괘씸한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그 직원의 무섭던 표정이 되살아나 화 한번 못냈다. 그 더운 여름에 3주동안 꼼짝없이 손빨래 한 것을 생각하면 두고두고 분이 치밀어 올랐다. 외국과 무턱대고 비교하는 것이 옳지는 않지만 그 일이 있은 직후 시누이를 방문하기 위해 남편과 함께 미국을 가게 됐는데 그 곳은 참으로 소비자를 위할 줄 아는 사회라는 것을 경험했다.
꼬마에게 줄 물놀이튜브를 10달러에 샀다가 다른 상점에서 똑같은 물건을 몇십센트 싸게 파는 것을 보고 항의했더니 놀랍게도 환불해주는 것이었다. 시누이 말로는 미국에서는 쓰던 물건, 심지어 남에게서 선물받은 물건이라도 제품의 흠이 뒤늦게 발견되면 교환이나 환불해주는 상점이 많다는 것인데 이는 소비자 고발권이 철저히 시행되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들었다.
소비자권익은 소비자 스스로가 찾는 것이며 이 점에선 나처럼 잘 참는 것이 결코 능사는 아니었던 것이다. <경기도 광명시 철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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